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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5 20:21
추석명절을 맞아 거불회에서 열 숟가락 운동에 동참했거니와 치하합니다.
그리고 매달 빠짐없이 소정의 보시금을 이 운동에 기부하는
오불회, 불수회, 영남강독회, 불교의힘 법우들에게도 각별히 감사의 마음 표합니다.
우리나라의 구산선문은 입당 구법승들이 중국의 홍주종 계통을 이어서 성립합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선 전래 전에 화엄교학이 주류였고, 그리하여 구산선문의 개창조들이 모두 화엄에 일가견을 가진 자들이라는 점과 홍주종이 능가경의 여래장 사상을 중심으로 하고 그 여래장 사상의 입장에서 화엄경을 해석한 것이 화엄학이라는 점을 결합해 보면 연관 관계를 찾을 수 있다고 스승이셨던 고익진 박사님은 일러주셨습니다.
근본적으로 화엄교학은 마음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니와 그것은 일체유심조에서의 마음의 해석에서부터 원래 화엄경의 사상을 지나쳐버린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을 절대시하면 아니되는데도 화엄교학은 마음의 절대시에 나선 것입니다. 선종 참선가들도 똑 같습니다. 마음에 대상을 제외한 채(즉심) 마음 그 자체로(무심) 일여하게 지속되는 것(일심)을 찾거니와 그것은 화엄교학에서 찾으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화엄교학의 바탕이 되는 여래장 사상은 유식학이 그 배경이며, 유식학 또한 마음의 절대성에 매몰된 경향을 보입니다. "유식학→여래장사상→화엄교학→선종 중 홍주종→한국의 구산선문 중 8문"의 흐름을 좀 거칠지만 추적해 볼 수 있거니와, 이 모두 실상진여의 존재성에 대한 천착이 미약합니다.
신라 중대의 화엄교학이 제대로 된 화엄경의 사유를 간직하여, 실상진여에의 합일 계합이 일심 성취의 유일한 방법임을 제대로만 천명했다하더라도, 신라 하대에 선종이라는 새로운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필요 없었을 줄 모르고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굳이 선종 위주의 한국불교를 대하지 않았을 줄 모를 일입니다.
사실 화엄교학은 법계연기라고 하면서 법계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의식하고 있었지만 그 법계를 지나치게 유심론적으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비록 법계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직 계층의 형해를 지니고 있어 완전한 진여실상이라고 못하는 문제점이 존재합니다.
화엄교학에서는 가끔 화엄경의 해석이니만치 法性에 대한 언급이 주류를 이루나 이 법성이 법계와는 어떤 관계를 맺는지도 불분명하게 파악하는 것을 봐서는 그 이해가 확실하다 할 수 없습니다. 법성이든 법계든 마음 위주의 해석에 매몰된 이상 정확한 佛意를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었던 것이죠. 일미진 속에 삼천대천세계가 있다고 하면서 어떤 구조이기에 그것이 가능한지는 관념적인 설명에 그치고 마는 것은, 화엄경의 佛意를 대하면서도 해석은 외도인 바라문 사상의 아트만 설에 빠진 듯하니, 여기에야말로 獅子吼를 가지고 野牛鳴에 그치게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우리 인터넷불교대학 마하나와 아슈람의 모든 강의는 이러한 역사적인 천착에 바탕하여, 진정한 부처님 뜻을 천명하고자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도량의 발전을 위한 운동에 동참하는 오불회, 불수회, 영남경전강독회, 거불회, 불교의힘 등 여러 법우에게는 필히 부처님의 사자후가 막힌 바를 시원하게 뚫어주는 일이 있으리라 단정하는 바입니다. 다시한번 위에 언급한 여러 법우들의 동참을 치하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