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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8 23:19
코로나사태가 너무 오래 지속되다보니 3단계 발령도 고려하겠다는 정부 당국의 발표를 접하며, 스승님과 가족분들. 아슈람도반님들과 가내의 건안이 걱정스럽습니다. 12월 법회도 봉행하지 못하여 모두 심신이 편치않으리라 사료됩니다. 부디 마음을 다스리며 건안하시고 강녕하시길 불. 보살님전에 비옵니다. 장경진불자 합장. 나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법정(法頂)스님의 맑고 향기롭게
수필 <무소유>의 저자인 법정스님(어릴 때의 이름 : 박재철. 1932년~2010년)의 법문을 2007년부터 매월 한 번씩 2년 가까이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서울 성북구에 있는 사찰 <길상사>법회였다.
법정스님은 그 당시 강원도 두메산골의 조그마한 농가에서 홀로 살고 있을 때다. 스님은 불교적 깨달음의 사회적 실천모임인 시민사단모임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을 주관하고 있었다. 강원도에서 새벽에 시외버스로 와서 법문을 하시고, 회원들과 담소를 나누고는, 당일 오후에 다시 거주하는 농가로 간다고 했다. 회원들에게도 자신이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면, 가족과 사회모두가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게 된다고 하셨다. 나도 불자이면서, 수필공부를 하고 있을 때라, 열심히 법문을 들으며, 법회에 참석하곤 했다.
법회의 법문도 길게 하지 않고, 회원들 간의 담소도 녹차 한 잔 마실 만큼의 짧은 시간에 끝내셨다. <맑고 향기롭게 운동>의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향기롭게는 그 청정의 사회적 메아리를 뜻한다고 하셨다. 우리 회원들은 연꽃 한 송이가 그려져 있는 <맑고 향기롭게, 연꽃캐릭터>스티커를 차 앞면에 자랑스럽게 붙이고 다녔고, 스님과의 법회를 항상 기다렸었다.
스님은 효봉큰스님(어릴 때의 이름: 이찬형, 1888년~1966년)의 제자로써 진정한 수행자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스님은 겉으로 보기에는 면도날 같이 냉철한 모습을 보였으나, 일반 신도나 회원들에게는 조용한 미소와 다정다감한 모습을 많이 보여 주시곤 했다. 스님은 말, 글, 행 3가지 일치를 행하셨다. 보통 언행일체를 많이 보이지만, 스님은 언행(言行)일치와 필행(筆行)일치를 보이며, 맑고 아름다운 영혼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셨다. 평생을 빨래나 청소 등 일상생활을 혼자서 해결하며 지내셨다.
스님의 무소유정신은 스승인 효봉스님의 영향을 많이 받으셨다. 효봉스님은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판사로 재직하다, 일제치하의 부담감 때문인지 판사직을 그만두고, 엿장수를 하다 출가하여 절구통수좌(참선 시는 몇 시간을 꼼짝도 않으신 채 무언으로 앉으신 채 참구함), 엿장수스님, 판사스님이라 자주 불렸다한다. 철저한 구도자, 수행자로서의 정신을 그대로 본받은 법정스님은 효봉큰스님을 언제나 존경하였다. 효봉큰스님과 법정 두 분은 그 스승에 그 제자였다.
법정스님은 1932년 일제치하시절에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시고, 전남대학교 재학시절인, 1956년에 효봉큰스님에게 출가허락을 받으시고, 경북 봉화에서 수행자로서의 삶을 시작하셨다.
쌍계사 등을 거쳐, 불. 법. 승 3보의 승보(僧寶)사찰인 송광사의 불일암(佛日庵)에서 17년간 경전번역사업과 수행생활을 하셨다. 스님은 불일암을 떠난 1년 후에 수필 <무소유>를 발간하여 문필가로서의 길을 걸으며, <산에는 꽃이 피네>등 다수의 문집을 발간하였다.
스님은 1993년부터 <맑고 향기롭게 운동>을 시작하였다. 스님은 출가 후 50여 년 동안 주지를 한 번도 맡은 적이 없었다.
서울 삼각산 기슭 성북구에 김영한 여사장이 운영하는 대원각이라는 요정이 있었다. 그 요정은 오래된 단골고객들이 많이 오는 큰 요식업체 이었다. 그 여사장은 독실한 불교신도로써 나이가 들어서, 그 장소에 사찰을 짓고 싶은 마음으로, 법정스님에게 조건 없는 보시를 하겠다고 하였다.
미국 LA에서 법회 하러 오신 법정스님에게 “삼청동 대원각을 스님에게 보시하고 싶습니다. 그 자리에 사찰을 세우십시오.”
그러자 법정스님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 보시를 거의 10여 년간 고사하며 거절하였다. 그러다가 1997년 법정스님의 개인사찰이 아닌 <송광사 서울분원>명의의 종단재산으로 등록하여 1997. 12.14일에 길상사 개원법회를 열었다. 그 개원식에는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도 참석하여 축사를 하며, 종교 간의 화합을 이루기도 했다. 7000여 평의 대지와 40여동의 건물은 시세 1000억 원의 거대한 보시가 이루어진 것이다. 개원식 날 사찰이름을 길상사(吉祥寺)로 하였고, 김영한 사장에게는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주었다. 길상사는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길상사의 회주스님이면서도, 스님은 자신의 내면을 탐구하는 수행자의 자세를 잊지 않으며, 자기의 거처방도 없이 지낸 걸로 알고 있다. 길상사가 그 당시에 큰 이슈거리였지만, 수행자 법정스님에게는 그냥 스쳐가는 바람이었다.
어느 날 법정스님의 법회에서 <맑고 향기롭게>회원이신 여 보살 회원이 법정스님에게“스님이 계시는 강원도 움막에 저희 회원들이 한 번 방문하게끔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라며 청을 드렸다. 그 때 법정스님은 “그 정성으로 불우아동들이나 노인들에게 따뜻한 국밥이라도 대접하십시오. 서울생활이나 강원도움막집이나 세상사는 게 똑 같습니다. 그냥 길상사법회에서 보는 걸로 하시지요.”라며 회원들에게 편안한 미소로 답하셨다.
또 가야산 호랑이로 소문난 성철스님(어릴 때 이름 : 이영주, 1912년~1993년)과는 20년의 나이와 구도의 차이에 얽매이지 않고, 격의 없이 말을 나누었다 한다. 원리원칙에 충실하고 엄격했던 성철스님은 법정의 올곧은 수행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말년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홀로 정진하며 숙식을 이어갔다. 사심 없는 청정심을 유지하면서, 자기가 생을 끝낼 때는 장례식은 관 없이 간소하게 치루고, 불일암에 있는 나무 밑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셨다.
그리고 자기의 사후에는 자기의 문집 등을 재 발간하여 유포하지 말라는 유언도 남기셨다.
길상사에서 불일암으로 운구할 때, 스님의 극락왕생 길을 빌며, 절 올리며 바라보니, 관도 없이 입던 가사에, 가사 한 벌을 덮은 채로 운구차에 타셨다.
다음 생까지 나의 죄업을 갖고 가지 않게(수행자의 신분으로서 수필집 등을 발간한 것에 대한 자괴감 때문인 것 같음?) 자기의 문집을 발간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는데... 스님의 열반 후 제자들이 여러 논의를 거치더니만, 수필집을 재 발간하는 걸 보며, 그 제자들의 진심이 무엇이었을까? 라는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사제 간인 두 분 스님은 똑같이 향년79세로 세상을 하직하셨다.
<효봉 큰스님의 열반송>으로 글을 마감하고자한다.
吾說一切法 오설일체법 내가 말한 모든 법
都是早騈栂 도시조병모 그거 다 군더더기
若問今日事 약문금일사 오늘 일을 묻는다면
月印於千江 월인어천강 달이 일천 강물에 비치리니.
(2020. 6.15)
2020.12.30 23:48
2020.12.31 22:11
서울 도심 한 가운데에서 불자들의 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하여 주는 길상사....
저도 길상사 개원 법회에 참석하였었는데
법정스님과 김수환 추기경님, 두 분께서 함께 앉아 계시던 모습과 함께
길상사가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오랫만에 법정스님과 길상사를 추억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법정스님의 뜻을 새기면서 중생들의 '맑고 향기로운' 생활을 바래 봅니다.
2021.01.16 21:08
도반님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법정스님의 무소유> 법문은 세간법으로는 참 좋은법문입니다.
<근본불교> 출세간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수행자들에게는 '선정수행 9단계' 를
공부하면서 욕계, 색계를 지나서 무색계에 들어가면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의 경지가 있습니다.
"이때 '무소유처'는 성자의 반열에 들어있는 '신통의 경지'로서 '오하분결' 이 거의 다 멸진하여
'아라한 초입'에 들어가는 경지" 라고 배웠습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 두근 콩닥 콩닥합니다.
오불회 회장님도 저와 같은 입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나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