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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6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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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17 01:36
2016.05.17 02:57
부처님 오신날 기념 공개 강좌 제 2강 “大乘是佛說” 자료(1)
* <<대반열반경>>35, 90~91단락(N.D.P.판)
35. 아난다야, 비구 승단이 나에게서 다시 무엇을 더 기다리는가. 아난다야, 안과 밖이 다르지 않게 나는 법을 설했다. 아난다야, 여러 법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여래에게는 스승으로서의 인색함이란 없었다.(Desito, ānanda, mayā dhammo anantaraṃ abāhiraṃ karitvā. Natthānanda, tathāgatassa dhammesu ācariyamuṭṭhi.)
90. 부처님께서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한 명의 비구라도 부처님과 교법과 승단과 도와 길에 의혹이나 당혹함이 있다면 묻도록 하라. 뒤에 후회하지 말라. ‘나는 부처님의 면전에 있었는데 면전에서 부처님께 질문하지 못했구나.’라고 하며.” 이와 같이 설하셨을 때 그 비구들은 침묵했다. 두 번째로 그리고 세 번째로 부처님은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한 명의 비구라도 부처님과 교법과 승단과 도와 길에 의혹이나 당혹함이 있다면 묻도록 하라. 뒤에 후회하지 말라. ‘나는 부처님의 면전에 있었는데 면전에서 부처님께 질문하지 못했구나.’라고 하며.” 세 번째도 그 비구들은 침묵했다. 그리하여 부처님은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스승을 존중해서 물을 수 없다면 도반끼리 말하도록 하라.” 이와 같이 설하셨을 때 그 비구들은 침묵했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 놀라운 일입니다. 부처님,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부처님, 저는 이 비구 승단에 대해 마음이 깨끗해졌습니다. 한 비구에게도 부처님과 교법과 승단과 도와 길에 대해 의혹함이나 당혹함이 없는 것입니다.” “아난다야. 너는 깨끗한 믿음을 말했다. 그러나, 아난다야, 여래는 오직 앎에 의해 이 비구 승단에 의혹이나 당혹함이 없음을 말한다. 아난다야, 이 500명의 비구들 가운데 마지막 비구조차 흐름에 이르렀고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법이고, 결정되어 있고, 삼보리를 목표로 한다.”
91 부처님은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자, 비구들아. 지금 나는 너희들을 불러 말한다. 결합된 것들은 흩어지는 법이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여라.”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말씀이었다.
35단의 안과 밖이 없이 인색함이 없이 법을 설하셨다는 말씀은,
말씀으로 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전했다는 뜻이다.
90단의 한명의 비구도 불법승과 道와 길에 있어 의심이나 당혹함이 없었다는 기사를 두고, 대승비불설의 논거로 삼는 것은 다음의 과정을 거친 것이리라.
1) 일단 부처님은 언어로 설할 수 있는 모든 법에 대해서 설하셨다.
2) 열반 당시 500 비구 중 마지막 수다원 비구조차 어떤 의심(예를 들어 “내가 혹여 듣지 못한 법이 있지는 않나?” 하는 의심)도 없었음을 볼 때, 부처님의 설법의 전부를 모두 듣고 기억하고 있었다고 해야 한다.
3) 하물며 결집시에는 500 아라한들이 송출해 낸 것이 아함경이므로, 아함경 외에는 부처님이 따로 설하신 것은 없다.
4) 그러므로 대승경전은 비불설이다.
* 이러한 전개 과정에서 대반열반경의 35단과 90단이 기여한다면, 35단은 1) 번으로 표현될 수 있음은 인정해야 한다.
* 문제는 90단이 어떻게 기여하느냐이다.
* 만일 90단의 의미를, 열반 당시 부처님을 장엄했던 500비구 중 한명이라도 불법승 삼보와 道와 길에 의심과 당혹함이 없었음을, “그 500비구 중 누구라도 부처님의 모든 설법 내용을 다 듣고 기억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90단의 의미를 2)번 문장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
* 특히 부처님 열반 당시 동행했던 500비구는 모두 아라한은 아니었고, 沙門四果의 비구들이 혼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심지어 수다원과의 비구들도 만일 부처님의 모든 설법의 내용을 다 듣고 기억하고 있다면, 아라한들은 말할 게 뭐 있겠냐는 관점은 타당하다.
*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다.
* 마지막 수다원 비구조차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정말 다 들었고 다 기억하고 있었을까?
* 그러기에 90단에서 말하는 의심이, “혹여 내가 조금이라도 듣지 못한 부처님의 말씀이 있지는 않나?” 하는 의심이라고 해석해도 될까?
* 일단 수다원 비구가 부처님의 모든 말씀을 다 들었고, 모두 다 기억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 물론 500비구 중 마지막의 수다원도 부처님 말씀을 다 듣고 기억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지 못한 가능성이 더 크다는 말이다.
* 먼저 출가한 지가 상대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면 부처님의 말씀을 다 들을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모자랄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 그런데 물리적인 시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불법의 說相에 의한 제한 상황이 있다. 즉 수다원 비구는 궁극적 목표로서의 부처님 삼보리에 이르는 ‘대강의’ 흐름에 관해서는 들었겠지만, 수다원 비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삼보리와 관련된 ‘상세한’ 설법을 들었을 개연성은 적다.
* 왜냐면 부처님은 次第性 곧 次第學(anupubba-sikkhā)‧次第作(anupubba-kiriyā)‧次第道(anupubba-paṭipadā)를 내세우신 분이다. 이 말은 특화된 수련 공동체를 전제로 법을 설하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들을 수 있는 자들에게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베풀었다는 뜻이며. 당사자의 수준을 넘어서는 법에 대해서는 “상세히” 이야기하지는 않으신다는 뜻이다.
* 비유하자면 초등학생에게 미적분의 세계가 있다는 말은 해줄 수 있어도, 미적분의 “상세한” 이치를 말해 줄 수는 없지 않는가?
* 이런 논의는 심지어 아라한 비구에게라 하더라도, 부처님의 삼보리와 관련된 구체적인 소식에 대해서는 아라한도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상세히” 설하지 않으셨을 개연성이 크고, 그러니 삼보리와 관련된 “상세한” 소식의 대부분은, 대다수의 아라한이라도 못 들었을 개연성은 상존한다는 귀결에 이르게 한다.
* 그런데 이 대목에서 중요한 반전이 있다.
* 좀 전에도 잠시 언급한 비유이지만, 초등학생에게
① 미적분이라는 수학이 있다는 말은 해줄 수 있다.
② 하지만 미적분의 “상세한” 이치는 말해 줄 수 없다.
③ 하지만 너도 나중에는 미적분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말도 해줄 수 있다.
④ 아울러 대학생들은 이미 미적분의 “상세한” 이치를 듣고 공부하고 있다고 말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 마찬가지로 수다원에게
① 부처님의 삼보리라는 게 있다는 말은 해줄 수 있다.
② 하지만 삼보리의 “상세한” 소식은 말해 줄 수 없다.
③ 하지만 너도 나중에는 삼보리를 성취해야 한다는 당위적 선언은 해줄 수 있다.
④ 아울러 큰 제자들은 이미 삼보리의 “상세한” 소식을 듣고 공부하고 있다고 말해줄 수도 있는 것이다.
* 실제 부처님은 수다원에게조차 결국은 ‘부처님의 삼보리’를 성취해야 한다는 당위적 선언을 하고 계신다. 그것이 바로 대반열반경 90번 단락의 결론임은 매우 중요하다.
* 곧 “이 500명의 비구들 가운데 마지막 비구조차 흐름에 이르렀고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법이고, 결정되어 있고, 삼보리를 목표로 한다
.(idh' āvuso bhikkhu tiṇṇ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sotāpanno hoti avinipāta-dhammo niyato, sambodhi-parāyano.)”는 부처님 말씀을 주의해 보라.
* parāyaṇa : n. (in fine compositi or 'at the end of a compound';f(ā-).) making anything one's chief object, wholly devoted or destined to, engaged in, intent upon, filled or occupied with, affected or possessed by
* 바로 예류과의 설명을 보면, “열반”을 목표로 한다가 아니고, “삼보리(=正覺, sambodhi)”를 목표로 한다는 표현으로 부처님은 일관하시거니와, 이것이 예사롭지 않다.
* 사실 초기불교는 궁극적인 위상을 언제나 열반으로 귀결하지 깨달음에 대한 강조는 상대적으로 약하기에. 수다원의 궁극적 목표를 ‘삼보리’로 잡은 것은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불어 더 큰 관심을 모으는 것은 삼보리 곧 sambodhi라는 술어의 쓰임이다.
* 초기불전에서는 깨달음이라는 표현으로 sambodhi, sambodha, bodhi, anubodha 등 여러 형태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sambodhi라는 술어의 위상은 독보적이다. 바로 부처님의 깨달음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줄임말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 같은 대반열반경 제15,16단 “사리풋타의 사자후” 이야기에서 sambodhi 용법의 정형을 볼 수 있다. 사리불이 부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할 때도 등장하는 말은 열반이 아니라 sambodhi이다. 그런데 그 sambodhi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것이다.
* 15 사리풋타 존자가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왔다. 와서 부처님께 공손히 절한 다음 한쪽에 앉았다. 한쪽에 앉은 사리풋타 존자는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 저는 부처님에 대해 이와 같이 깨끗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다른 사문 바라문으로서 부처님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지금도 없습니다. 바로 삼보리에서 말입니다.(`evaṃ-pasanno ahaṃ bhante bhagavati na cāhu na ca bhavissati na c' etarahi vijjati añño samaṇo vā brāhmaṇo vā bhagavatā bhiyyo 'bhiññataro yadidaṃ sambodhiyan'ti.”)”
........ “사리풋타야, 지금 너에게는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동등하시며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부처님들의 마음을 너의 마음으로 파악할 정도의 지적 능력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네가 훌륭하고 황소와 같은 말을 하게 되었고, 절대적인 경지가 파악되어 사자후를 외치게 되었는가? ...... 부처님, 저는 법이라는 문에 입각해 알 뿐입니다. 곧 부처님, 지금의 동등하시며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으신 부처님께서는 마음에 때로서 붙어 있고 지혜를 약하게 하는 다섯 가지 덮개를 버립니다. 그리고 네 가지 정념해야 할 것에서 마음을 잘 확립시키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인자에서 있는 그대로 익히셨기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더 이상 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잘 깨달으신 것입니다. (*bhagavā pi bhante etarahi arahaṃ sammā-sambuddho pañca nīvaraṇe pahāya cetaso upakkilese paññāya dubbalīkaraṇe catusu satipaṭṭhānesu supatiṭṭhita-citto satta bojjhaṅge yathābhūtaṃ bhāvetvā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 ti.)
2016.05.17 03:00
부처님 오신날 기념 공개 강좌 제 2강 “大乘是佛說” 자료(2)
* 물론 남방상좌부는 수다원에서 언급된 sambodhi를 성문의 깨달음이라고 해석하려 할 것이다.
* 아니나 다를까, sammāsambodhi, paccekasambodhi, sāvakasambodhi의 삼종 삼보리를 거론하는데, 이중 sāvakasambodhi의 의미로 보려할 개연성이 있다.
* 하지만 이 세 표현이 연결되어 나타나는 자료는 장로게 주석서(Theragāthā-aṭṭhakathā)등일 뿐이고, 이중 sāvakasambodhi라는 표현 자체는 오부니카야 전체를 통 털어 한번도 나오지 않는다.
* 그리고 paccekasambodhi라는 표현은 오부니카야 중 11번째 책인 <출라니데사>에서 3번 언급될 뿐인데, 알다시피 이 문헌은 아쇼카왕 시대 또는 그 이후에 성립된 것으로, 결코 부파가 분열되기 전에 성립한 문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권위가 좀 떨어지는 작품이다. 결국 부파분열전에 그 원형이라도 성립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고층의 자료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표현인 것이다.
* 따라서 권위 있는 고층의 자료에 의할 경우 sambodhi는 sammāsambodhi, 또는 anuttarā sammāsambodhi에서만 주로 쓰이는 것이다.
* 그리고 경전에서는 부처님에 벽지불과 정등각자가 있다 했듯이 깨달음에는 벽지보리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둘을 상정하는 것이 좋다.
* 물론 벽지불(paccekabuddha라는 표현은 16회 정도 출현)을 벽지삼불타(paccekasambuddha)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으니 고층의 자료에는 21회 정도 쓰인다. 하지만 벽지삼보리(paccekasambodhi)라는 표현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고층 자료에서는 한 차례도 쓰이지 않고 심지어 paccekabodhi라는 표현조차 그 자체로는 고층의 자료에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는다.
(중부경전 <<이시길리 경>>에 “Paccekam-evajjhagamaṃsu (su)bodhiṃ”이라고 하여, 거의 육박하는 표현이 나오니, 이것을 고층자료에서는 유일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나마도 정형화된 모습은 아니다. 그외에는 소부 소송경에 한차례 그리고 후대 작품에 두 차례, 그리고 paccekasambodhi로 쓰이는 것 중에 다른 판본에서 paccekabodhi로 쓰인 것이 몇 개 있다.)
그러므로 삼보리는 기본적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 이런 자료적 현황에도 불구하고 수다원 비구에게서 언급된 sambodhi를 성문의 깨달음으로 고집하는 것은 지나치다.
* 그런데 그 고집의 배경에 부처님의 깨달음은 부처님이 될 자, 곧 본생보살만이 얻는 것이지, 결코 일반 수행자들이 얻는 것은 아니다는 사고 방식이 깔려 있다면, 나는 다음의 경설을 소개하고 싶다.
* 증지부 경전 4법부 (Catukkanipātapāḷi) 1. Paṭhamapaṇṇāsakaṃ 2. Caravaggo 1. Carasuttaṃ에는 ‘‘Yo ca caraṃ vā tiṭṭhaṃ vā, nisinno uda vā sayaṃ;/ Vitakkaṃ samayitvāna, vitakkūpasame rato;/ Bhabbo so tādiso bhikkhu, phuṭṭhuṃ sambodhimuttama’’nti. “행주좌와에 세 가지 사색을 파악하여, 사색이 멈춘 것을 즐거워 하는 자라야 최상의 sambodhi를 성취하는 것이 가능하다.” (phuṭṭhuṃ=phusa+tum, phusati= to attain,to reach,only in specific sense of attaining to the highest ideal of religious aspiration) (Itivuttakapāḷi 4. 1. 11. Carasuttaṁ (110) 에도 그대로 나옴)
* 곧 본생보살이 아니라, 일반 비구를 주어로 uttama 곧 최상의 sambodhi를 언급하고 있다. 여기의 sambodhi를 성문의 sambodhi로 국한할 수는 없지 않는가? 다시 말해 3종 삼보리를 인정한다 해도 당연히 최상의 sambodhi는 부처님이 돼서라야 성취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일테니까!
* 이처럼 초기불전의 자료론적인 현황에 입각하면, sambodhi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지칭한다고 보아 무난하고, 그런 삼보리를 본생보살이 아니라 일반 수행자도 성취한다고 읽히는 대목을 만난 셈이다.
* 그러면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sambodhi가 예류과를 이야기할 때 일관되게 쓰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1) 그것은 불교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반이 아니라 삼보리이며, 아라한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이루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고 볼 수 있다.
(2) 두 번째 부처님은 모든 것을 설하셨으니(대반열반경 35단), 열반의 성취가 아니라 삼보리의 성취와 관련된 말씀도 대강이 아니라 ‘상세히’ 다 베푸셨다는 뜻이고, 아라한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부처님을 이루는 것과 관련된 말씀도 대강이 아니라 ‘상세히’ 다 베푸셨다는 뜻이 된다.
(3) 물론 수다원의 성자, 나아가 대다수의 아라한들도 삼보리 성취와 관련된 대강의 말씀만 들었지, 상세한 내용을 다 듣지는 못했을 것이다. 왜냐면 삼보리의 상세한 소식을 감당할 수준은 못되기 때문이다.
(4) 그래서 아함경에는 열반의 성취 및 아라한이 되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가 주로 나올 뿐이며, 아함경에 부처님의 삼보리와 관련된 상세한 말씀이 다 담겨 있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5) 그러기에 최소한 초기 대승 경전에 가야 삼보리의 성취와 부처님을 이루는 것에 관련된 상세한 말씀이 본격적으로 담겨 있으니, 최소한 초기 대승경전은 불설이라고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대승불교를 무조건 비불설이라고 내치는 것은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 불기 2560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그 첫 번째로 불교의 실천 체계를 강의하면서, 초기불교에서 그치지 않고 대승불교의 보살행과 불사까지 격상시킨 데는, 그리고 전중생의 성불과 불국토 건설을 서원하라고 강조한 것은, 대승불교의 진실성에 대한 이런 성찰이 바탕에 깔렸기 때문이었다.
* 아울러 부처님은 이제 겨우 사문 사과의 초과를 성취한 수행자에게 부처님의 삼보리를 목표로 재설정하고 부촉하는 계시니, 가히 法華의 授記마저 연상되지 않는가! “아함은 대승의 기초요, 대승은 아함의 완성이라!”는 한 선각자의 선언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아울러 마지막 비구에게도 의심이 없었던 것은 사실 그가 수다원이기 때문이다.
* 수다원은 불법승 삼보와 길과 도에 대한 의심이 끊어진 경지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有身見의 결박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유신견이란 “어떤 몸으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집착”인데, 이 집착이 단절된 것이다. 그리고 그 단절의 과정에 그 어떤 몸이 해체되어도 결코 공허해지지 않는 놀라운 소식이 있음을 파악한다. 그 놀라운 소식의 체험은 앞으로 진행될 어떤 부처님의 말씀에도 의심과 당혹함을 없게 만드니 비록 삼보리를 얻어야 한다는 말씀이라도 마찬가지이다.
* 물론 이 모든 논의의 핵심 중에 사실 아직 다루지 않은 것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열반과 삼보리의 차이를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주제가 있다. 이 주제는 공개강좌로 다룰 수 있는 수준은 넘어선다. 하지만 피해 갈 생각도 없다. 이 강좌 초기불교 깨달음의 구조와 정체가 마무리 지어질 무렵에 초기불교를 넘어 대승불교로 나아가야 할 필연성을 언급할 것이거니와, 그때 열반과 삼보리의 차원이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언어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 언급할 것임을 약속한다.
* 초기대승경전을 불설로 보는 나의 입장을 대승비불설에 빗대어 요약하여 남긴다.
大乘非佛說
1) 일단 부처님은 언어로 설할 수 있는 모든 법에 대해서 설하셨다.
2) 열반 당시 500 비구 중 마지막 수다원 비구조차 부처님의 설법을 모두 듣고 기억하고 있었다.
3) 하물며 결집시에는 500의 아라한들이 송출해 낸 것이 아함경이므로, 아함경 외에는 부처님이 따로 설하신 것은 없다.
4) 그러므로 대승경전은 비불설이다.
大乘是佛說
1) 일단 부처님은 언어로 설할 수 있는 모든 법에 대해서 설하셨다.
2) 결집시 500 아라한들 모두가 삼보리에 관한 상세한 설법의 전모를 다 들었던 것은 아니다.
3) 그래서 500의 아라한들 기억의 공통분모로 송출해 낸 아함경에는 삼보리관련 설법의 상세한 전모는 들어 있지 않으니, 따로 담길 수밖에 없다.
4) 그러므로 대승경전을 함부로 비불설이라 하면 아니 된다.
2016.05.27 07:42
대승 시불설에 대한 의혹이 밝아졌습니다. 스님들께서 논쟁하시던 것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각자의 견해에 대한 주장만 있었지 결론이 없었습니다. 법문 감사드립니다. 적조 합장
2017.07.24 09:35
대승시불설/대승비불설
1)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주제에 대해서는 무기로 임하셨다. 즉 모든 법을 설하시지 않았다.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진리는 설하지 않으셨다. 또한 인간의 언어해상도가 낮아서 코끼리(깨달음, 실체.실상, 진리)의 모든 것을 언어화할 수 없다.
2) 500 아라한들 모두가 부처님 설법을 아난처럼 모두 다 들었던 것은 아니다. 500 아라한 모두가 다 부처님 설법을 모두 다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3) 500 아라한의 만장일치제 역시 불가능하다. 500 아라한이 모두 아난처럼 부처님 옆에 항상 있지 않았고 아난처럼 기억의 천재가 아니기 때문에 만장일치제가 될 수 없다. 500 아라한의 만장일치제란 번뇌 망상의 표출이다.
4) 대승이 부처님의 원음 불설인지 아닌지는 눈뜬 자이던 눈먼 자이던 부처님 시대에 생존했던 자가 아닌 이상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코끼리(깨달음. 실체, 진리)를 올바로 설해 놓았는가이다. 초기경전에만 정법 불설이 담겨있는 것은 아니다. 대승에도 불설이 담겨 있다. 부처님의 원음에 의한 것이던 혹은 부처님 입멸 후 어느 눈 뜬 각자들에 의해 설해진 것이던 코끼리(깨달음, 실체, 진리)를 올바로 묘사해 놓은 설들이 보인다. 눈먼 중생은 아무리 눈 씻고 잘봐도 볼 수 없으나 눈뜬 각자는 볼 수 있다.
대승에 담겨 있는 불설을 볼 수 있는 존재는, 말해줄 수 있는 존재는, 대승의 불설 비불설을 가려줄 수 있는 존재는 눈 뜬 자, 각자 아라한뿐이다. 아라한은 눈을 떴을 뿐만 아니라 번뇌망상이 멸한 존재이다. 때문에 코끼리(깨달음, 실체, 진리)를 지견한다.
코끼리(깨달음, 실체, 진리)를 지견하는 눈뜬 세상 이 곳 출세간에는 번뇌망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중생은 눈 먼 세상, 세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코끼리를 볼 수 없다. 또 번뇌망상의 존재이기 때문에 번뇌망상으로 해석을 한다. 그로 인해 대승에 담겨있는 불설을 볼 수 없다. 아무리 대승 경전을 더듬어도, 불교학의 그 어떤 석학도 결코 실체를 볼 수 없다. 번뇌망상의 존재 중생은 해석의 위험성을 깊이 인지하고, 자신이 눈먼 세상에 살고 있음을 또 번뇌망상의 존재임을 깊이 자각하고 해석에 신중을 기하고 기해야 한다.
아무리 신중을 기해도 눈 먼 중생은 더듬어 짐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또 번뇌망상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개구즉착이 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해석을 아예 시도하지 않는 게 정법을 위한 최선이다. 부처님 입멸 후 2560년에 걸친 방대한 세월 동안 범해진 개구즉착들로 비불설이 넘쳐나는 불교계에 오염만 증대시킬 뿐이다.
5) 눈먼 이가 대승에 담겨있는 불설을 진정 알고자 한다면..... 현명한 자는, 올바른 자는, 지혜로운 자는 눈뜬 이를 찾아 눈뜬 이 각자 아라한에게 물을 것이다.
6) 눈뜬 이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눈뜬 존재에 대한 관심이란 불교계의 어느 구석에도 없는 관심사 같다. 불교학자이던 승려이던 그들은 찾아 나설 생각도 없고 눈앞에 나타나도 관심이 없다. 귀를 열지도 않고 마음을 열지도 않는다. 그들은 과거에 쓰여진 경에만 눈이 가 있고 마음이 가 있다. 불교학자들은 2560년 전에 남겨진 경과 부처님 입멸 후 2560년 동안에 쌓여진 비불설로 정답이란 결코 내지 못할, 장님들의 끝이 없이 반복되는 쳇바퀴 말놀이(토론, 연찬회, 논단...)에만 몰두한다. 마치 그것이, 말놀이가 목적인양.
때문에 과거의 각자의 말이 아닌 현재에 생생히 살아있는 현존하는 각자의 말로 2560년 전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진리들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다.
과거의 각자의 말은 경을 열심히 더듬어 알려 하면서 현재의 각자는 외면한다. 과거의 각자나 현재의 각자나 동일한 존재인데도 말이다. 각자는 시대를 초월하여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동일한 진리를 말한다.
불교학자 또 승려 그들의 눈과 귀, 마음은 과거 경에 석고화 되어 있다. 즉 생존하는 눈뜬 존재란 불필요하다는 것. 과거 경을 통해 이미 다 알 것은 다 알고 있다고 자부.확신한다.
그런데 알 것 다 아는 이들이라면서 정답을 못 찾고 왜 불설 비불설에 대한 주장들이 난무하는가. 모르는 게 있다는 것을 분명 공공연하게 인정하는 것인데, 여전히 눈뜬 존재를 찾아 나서지는 않는다.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말이다.
'중생은 여래를 볼 수 없다.' 이 말은 부처님이 알려주신 진리 가운데 하나이다.
이 말은 진리이나, 현대는 과학이 있다. 과학의 힘을 빌면 찾을 수 있다. 중생의 눈으로는 여래(아라한)를 볼 수 없지만 과학의 눈으로는 여래(아라한)를 볼 수 있다.
아라한이라 자처하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부처님이 안 계시니 그들이 진정 각자들인지 누가 인가를 해줄 수 있겠는가.
과학이 해준다. 현대의 뇌과학은 뇌파를 읽는다. 정각을 이룬 아라한의 뇌파는 중생과 다르다. 그 예로, 아라한에게는 해태혼침이 없다. 인간이 갖고 있는 해태혼침의 뇌파가 아라한에게는 없다.
해태혼침이 없음이 입증됨으로써 과학에 의해 인가된 아라한에게서만 불설 비불설에 관한 답을 얻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불설만 증대한다. 눈뜬 존재 또 번뇌망상이 멸한 존재가 각자이다. 때문에 각자 아라한에게는 정답이 있다.
아라한이 아닌 자로부터는 흘러나오는 번뇌망상으로 인해 또 코끼리(깨달음, 실체, 진리)를 지견할 수 없음으로 인해 비불설만 나온다. 2560년에 걸쳐 쌓인 방대한 비불설은 바로 그 때문이다.
- 눈뜬 이 (_) -
2017.08.05 21:28
교수님 강의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_( )_
대승 비불설은 가톨릭인들이 가끔 들고 들어옵니다.
대승불교는 부처님 설법이 아니고 이단이므로 너희 불자들은 아함경만 공부하라는 식의 공격이지요.
그러면 아함경으로는 그냥 니르바나에 이를 뿐이니 사회에서 격리되고 보시바라밀은 사라지는 셈이니
가톨릭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보디사뜨바라는 신비주의적 존재가 없다보니 아무래도 가톨릭이 유리하겠지요.
가톨릭인의 말은 보디사뜨바는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조금 발끈하죠. 뭐 예수는 실존한 인물인가요? 라고 말입니다. 허구의 태양신 종교 아니냐고 나가다가 결국
종교 충돌을 일으킵니다. ㅠㅠ.
언젠가 서강대학교 박홍 총장과 선불교 선승과 대화가 있었는데, 뭐 대화가 아니었죠.
선종으로서는 가톨릭을 상대하기가 버거울 것입니다.
어차피 선종은 혜능의 가르침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일 수가 없는데, 그래도 그들은
이심전심이라던가 뭐 아무튼 그런 언어로 전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자신들도 정통불교라고 주장하긴 합니다. 그런데 보디사뜨바를 주장하지는 않더군요.
허나 교수님 말씀대로라면 중국 선종도 불교가 맞을 수 있기도 하겠습니다.
제가 뭘 잘못 생각한 것 같습니다.
2019.06.26 00:08
*함부로 대승경전을 비불설(非佛說)이라 하면 안 된다.
스승님의 말씀이 지당. 또 지당하다 생각되옵니다/ 고맙습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