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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3 13:58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인도 델리는 겨울로 들어가는 문턱에 서 있서 1년 중 가장 편안한 계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인도에 돌아온 이후, 다시 경전을 읽고 있습니다.
마하나와 아슈람 강좌에서 범본 반야심경을 읽고 강의를 듣고 있습니다. 이제 인도도 귀한 마하나와 아슈람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인터넷 속도가 되었습니다.
반야심경 번역에 한가지 의문적인 부분이 있어 질문합니다.
tasmad apraptivad bodhisattvanam prajnaparamitam asritya viharaty acittavaranah /
교수님께서는 "따라서 얻음이 없는 까닭에 보살에게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에 걸림이 없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근본불교 가르침, p.257, 불교원전번역연구소)
Edward Conze도 영문 반야심경에서 교수님과 유사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는 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한 후 이것에 머문다는 의미인가요???
여기서 prajnaparamitam는 여성 단수 목적격으로 "반야바라밀다를(을)"로 번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 부분에 gambhirayam prajnaparamitayam은 여성 단수 처격으로 "반야바라밀다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asritya는 a-sri-tya로 tya는 동명사를 만드는 접미사입니다.
문법적으로 동명사는 한 문장에서 동사보다 선행하여 마무리된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적용됩니다. Monier Williams의 산스크리트 사전 p.158에 asritya는 "having sought or obtained an asylum(깨달음을 성취하고서)"으로 설명합니다. 물론 asri는 "획득하다, 도달하다, 의지하다" 등의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목적격어미와 동명사의 의미를 적용한다면
tasmad apraptivad, bodhisattvanam prajnaparamitam asritya viharaty acittavaranah /
"따라서 얻음이 없는 까닭에, 보살에게는 마음에 걸림이 없고, 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하고서 (반야바라밀다에)머문다 "
이와같이 번역하는 것이 더 명확하지 않을까요????
후반부에
tryadhvavyavasthitah sarvabuddhah prajnaparamitam asritya anuttaram samyaksambodhim abhisambuddhah /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하고서 다시없는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이루셨다.
이 문장들을 종합해 보면,
열반을 증득한 후, 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하고서, 무상정등정각을 이루는 단계적 깨달음의 성취를 보여주지 않을까요?????
인도에서
이건준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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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단락에서 공(=슌야타)을 제외하고는 어떤 얻음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바탕으로 이 단락이 자연스럽게 진행하게 된다. ‘①아프랍티트웨너 보디삿트와스여 프라즌냐 -파라미탐 -아슈리텨 위하라티 아칫타와라낫.(Aprāptitvena bodhisattvasya prajñāpāramitām- āśritya viharaty- acittāvaraṇaḥ; 以無所得故 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碍) ②칫타와라나-나스티트와드-아트라스토 위파랴사 -아티크란토 니쉬타 -니르와낫.(Cittāvaraṇa- nāstitvād- atrasto viparyāsātikrānto niṣṭhanirvāṇaḥ;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이 단락의 시작인 ‘아프랍티트웨너(aprāptitvena)’는 ‘아’라는 부정접두사와 ‘프랍티트와’(얻어냄이라는 것)이라는 명사 그리고 ‘에너(~ena)’라는 기구격 어미로 구성되어 있다. ‘에너’는 ‘~인 까닭에’ ‘~이기 때문에’ 또는 ‘~이므로’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아프랍티트웨너’는 ‘얻음이 없는 까닭에’로 해석된다.
‘얻음이 없기 때문에’를 이 단락의 시작으로 삼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앞 단락의 끝인 ‘너 프라티트왐’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앞 단락의 내용은 “공중(空中,śūnyatāyāṃ)에는 오온도 없고 육근도 없고 육경도 없고 십팔계도 없고 연이생법의 십이지분도 없고 연이생법의 십이지분의 멸진도 없고 명도 없고 명의 멸진도 없고 종합적으로 고집멸도도 없고 그리하여 앎도 없고 최종적으로 얻음도 없다.”(슌야타양 너 루팜, 내지 너 즌냐낭 너 프랍티트왐;śūnyatāyāṃ na rūpam, …… na jñānaṃ na prāptitvam. )이다. 이처럼 얻음이 없다는 끝 부분을 이 단락의 서두에서 그대로 받아 ‘아프랍티트웨너 …’(얻음이 없는 까닭에 …)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이 단락의 시작은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반야부 경전 차원에서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공의 세계(슌야타의 세계)라는 결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 슌야타의 세계에서는 그 어떤 것도 얻을 것이 없다.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보디삿트와스여 프라즌냐-파라미탐-아슈리텨 위하라티-아칫타와라낫.(bodhisattvasya prajñāpāramitām- āśritya viharaty- acittāvaraṇaḥ.;菩提薩埵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碍)’으로 시작할 수가 있고 주장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단락을 차근차근 살펴보자.
‘보디삿트와스여(bodhisattvasya)’는 ‘보살에게는’이다. ‘보살에게는’은 앞으로 어떤 존재나 사건이 언급될 때 그 존재나 사건의 주체가 보살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다. 보살에게 이러한 사건이 있다. 또는 보살에게 이런 존재가 있다고 이야기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그 어떤 존재나 사건일지라도 그것이 귀속되는 곳은 보살이고 보살이 주체적으로 일으키는 사건이요 존재라는 것을 알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면 얻음이 없는 까닭에 보살에게는 어떤 사건 또는 어떤 존재가 예상되는 것인가? ‘프라즌냐파라미탐-아슈리텨 위하라티(prajñāpāramitām- āśritya viharaty; 依般若波羅蜜多)’가 예상된다고 한다. ‘프라즌냐파라미탐’( 반야바라밀다) 뒤에 나오는 ‘아슈리텨’는 ‘의지하여’라는 뜻이고 그것은 이 경우 ‘도달하여’라는 뜻으로 읽힌다. 그리고 ‘위하라티’는 ‘머문다’이다. 그러니까 보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는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문다’는 사건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어찌하여 보살에게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문다는 사건이 벌어지는가? 공중에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고 얻지 않았기 때문에 보살에게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문다는 사건이 비로소 성취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가 있다.
‘위하라티’ 뒤에 ‘아칫타와라낫(acittāvaraṇaḥ)’이라고 하는 복합어가 뒤따라온다. ‘아칫타와라낫’은 ‘아(a-)’라는 부정접두사, ‘칫타(citta)’라는 명사, ‘아와라낫(āvaraṇa-ḥ)’이라는 명사가 결합되어 있는 일종의 복합어이다(끝의 ḥ는 주격어미). ‘칫타’는 마음, ‘아와라낫’은 ‘가림’이란 뜻으로 무언가를 가리는 것이다. 따라서 ‘칫타와라낫’은 ‘마음에 가림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칫타와라낫’앞에 부정 접두사 ‘아’가 붙어 있다. 그래서 ‘아칫타와라낫’은 ‘마음에 가림이 없다.’이다. 그러면 누구에게 마음에 가림이 없는가? 당연히 보살에게(’보디삿트와스여’) 마음에 가림이 없다.
그런데 ‘아칫타-아와라낫’을 문법적으로 보면 남성 주격이다. 그런데 이 복합어의 끝 단어인 아와라나(āvaraṇa)는 중성명사이므로 그것이 남성 어미를 사용했음은 생각할 것을 남긴다. 그리고 ‘보디삿트와스여’는 소유격인데 이 복합어는 주격어미를 사용하고 있음도 살필 부분을 남기고 있다. 먼저 ‘아칫타와라낫’이 남성이면 이것은 남성 주어를 수식하는 소유복합어로 사용된 경우라고 보는 게 좋다. 그럴 때 보살이라는 주어가 생략되었음을 생각해봐야 한다. ‘보디삿트왓(bodhisattvaḥ)’ 또는 ‘보디삿트보(bodhisattvo)’가 생략되어 있고, ‘보디삿트왓’을 소유복합어 차원에서 수식해 주고 있는 말이 ‘아칫타와라낫’이다. 그래서 이말 한마디만 가지고도 ‘보살은 그 마음에 가림이 없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보디삿트와스여’라는 소유격과 관계에 대해서는 '구경열반' 대목까지 가야 설명이 완료된다.
그래서 이단락의 첫 문장 ‘아프랍티트웨너 보디삿트와스여 프라즌냐-파라미탐-아슈리텨 위하라티-아칫타와라낫’은 전체적으로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보살에게는 얻음이 없는 까닭에, 그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의 가림이 없다.’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 문장은 ’아프랍티트웨너’(얻음이 없는 까닭에)에서 끊고 ‘보디삿트와스여 프라즌냐-파라미탐-아슈리텨 위하라티 아칫타와라낫’으로 해석해도 되지만 ‘아프랍티트웨너 보디삿트와스여’에서 끊고, ‘보디사트왓’이 생략되었으니 살려서 ‘프라즌냐-파라미탐-아슈리텨 위하라티 아칫타와라낫’으로의 해석도 가능하거니와, 필자는 후자의 해석법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프라즌냐-파라미탐-아슈리텨 위하라티 아칫타와라낫’도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가림이 없이 머문다.’이고, 다른 하나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무나니 마음에 가림이 없다.’는 해석이다. 여기서도 필자는 후자의 해석을 선호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해도 전체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결국 보살은 얻음이 없는 까닭에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머문다는 사실은 틀림없고, 머물 때 마음에 가림이 없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