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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4 00:10
오래전 '월간 해인'에 기고하신 최봉수 교수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최봉수 교수님과 고익진 박사님과의 대화는 깊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내게서 부처님과 경전과 스승은 하나이다. 스승을 통해서 경전을 만났고 경전을 통하여 부처님을 만나려 하기 때문이다. 80년대의 벽두, 아직은 꽃샘추위가 앙상한 가지 끝을 휘말아 놓던 어느 봄날 나는 처음으로 병고 고익진 선생님을 만났다. 수유리의 단칸방에서 독거하시던 그 분을, 그 때 나는 한 가지 고뇌스러운 의심을 여쭈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데 이리저리 헤매다가 지친 저 같은 사람도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병고 선생님이 질타하셨다.
"네 스스로를 그렇게 보지 말라. 과거 무수한 세월을 선재동자처럼 선근공덕을 심었고 구법난행을 해 온 자로 생각해라.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네가 이 만나기 어려운 불교학에 입문하려 했겠는가? 용맹스럽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마음을 내어라.“
그렇다. 그때 오십만 명이 대학 입시를 치루었는데 우리 학과에 입학한 인원은 고작 스무 명이었다. 나의 용렬한 계산에 따를 때 오십만 분의 이십은 거의 영에 가까웠고, 그것은 확률상으로 불가능한 일이 벌어진 것을 의미하였다. 오직 과거 세세생생의 선근공덕에 말미암았음을 믿어도 좋은 것이었다.
다시 여쭈었다.
"어떻게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까?“
깨달음의 가능성은 믿어졌기에 다음으로 깨달음의 방법론을 여쭌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수행해라."
그렇다. 그밖에 다시 무슨 방법론이 필요하겠는가. 나의 질문은 새삼스럽기조차 하였다.
다시 여쭈었다.
"부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수행하려면 먼저 말씀의 정체를 파악해야겠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그때 병고 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셨고, 서가에서 시리즈로 엮인 것 같은 한 무리의 책들 가운데에서 한 권을 뽑아 보이시며 평생에 잊지 못할 말씀을 하셨다.
"말씀은 경전에 있다."
그때의 그 책이 바로 팔리Pāli어로 된 남전 아함경 니카야였다. (그 뒤에 이것과 함께 범본 소품반야경과 법화경을 보여 주시며 불설의 시작과 끝이 이 경전에 있음을 가르치셨다)
인도에서 흥기한 불교를 지금은 전세계 어디서든지 만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시 오랜 전통을 지닌 불교문화권은 아시아 지역일 것이다.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연결되는 이른바 북방불교문화권이 있고, 이에 대해 스리랑카 미얀마 캄보디아 타일랜드 등지로 전래된 남방불교 문화권이 있다. 이 남방불교의 큰 공적이 바로 팔리 삼장(巴梨三藏, PāliTipitaka)이라는 불교 경전을 정연한 형태로 보존하고 있는 것이다.
경장 율장 논장의 삼장 가운데에 부처님과 그 직제자들의 설법은 경장과 율장에 실려 있다. 이들이 참된 불교의 정전正典이라 할 만하다. 이 가운데에 율장은 교단의 생활과 수행의 규범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이에 대해 경장은 그러한 규범의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모든 종교적인 방황을 종식시키고 모든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내는 깨달음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의 일차적인 관심은 자연히 경장에 있게 된다. 이 경장은 모두 다섯 니카야로 편찬되어 있고 이 가운데에 당장 장長 중中 상응相應 증지增支 니카야는 북방불교의 한역사아함漢譯四阿含에 대응본을 갖고 있다. 그런데 소小 니카야만큼은 일부 내용을 빼고는 남방불교의 경장에만 존재한다.
불교학계에서는 불교 역사상 가장 빠른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니카야 곧 아함경을 들고 있다. 이 아함경이야말로 부처님의 육성이 담긴 원초적인 경전이라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바로 이 아함경을 병고 선생님은 나로 하여금 처음 만나게 한 것이다.
흔히들 불교가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빽빽한 한자어로 씌어진 경전들은 우리의 발걸음을 돌리게 한다. 어쩌다가 용기를 내어 다가선다 해도 팔만사천이나 된다 하는 방대한 경전들 가운데에 어느 것을 먼저 접해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래서 법회를 다녀보고 불교 교양 대학을 나가 보고 하지만, 역시 알 듯 모를 듯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불교인 것 같다.
종교는 만남이다. 부처님을 만나든지 부처님의 경전을 만나든지 만남 속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만남이 꼭 쉬워야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까다로워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우리 같은 중생에게 끝없는 자비를 지니신다고 한다. 그러한 자비가 구체화된 것이 부처님의 마흔네 해에 걸친 설법이다. 그리고 그 설법이 바로 경전으로 정착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전을 만나는 일은 부처님을 만나는 것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부처님은 자비이고 자비는 곧 경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어려운 한자어 범어 팔리어로 된 경전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해야 될 필요를 느낀다. 옮기는 사람은 수고스럽겠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대다수의 언중言衆들은 그 때에야 비로소 만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대한 경전 가운데에 좀더 원초적이고 핵심적인 경전을 엄선하는 작업도 해야 할 것이다. 경전의 선별 작업은 위험 천만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바쁘디 바쁜 현대인들은 손에 들어올 만한 양할 때에야 비로소 만나려 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함경은 반드시 뽑혀야 한다. 가장 원초적이고 핵심적인 경전군 가운데에서도 으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아함경만 해도 방대한 분량을 지닌다. 한역 아함경만 계산해 보아도 우리말로 옮길 경우 오백 쪽 가량의 보통책 열다섯 권 분량이다. 여기에 남전 아함경인 니카야도 역시 그만한 부피로 버티고 있다. 그래서 아함경 안에서도 가능하면 원초적이고 핵심적인 경을 엄선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필요는 최근 우리나라의 경우 병고 선생님의 힘으로 충족되어져, 한 권 책 분량으로 아함경 전체를 정선해 내는 개가를 올린 적이 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룬 뒤에 최초로 다섯 비구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신다.
"여래는 동등한 자이며 바르고 원만하게 깨달은 자이다. 제자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불사不死가 이르렀다. 나는 설하겠다. 법을 가르치겠다. 수행하는 자는 오래지 않아 범행의 궁극을 똑똑히 볼 것이다."
누구든지 먼저 아함경을 읽자. 그리고 설한 대로 수행하자. 그랬을 때에 오래지 않아 우리도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2017.01.29 21:32
2017.02.07 06:54
법우님 올려주신글 감사히 잘 읽었읍니다
마음이 좀 게을려질려고 하는데......다시
정진해야 겠읍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2017.02.11 21:56
고익진 박사님과 최봉수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50만 분의 20이라는 합격률, 영에 가까운 불가능한 일이 성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생각하지 않고 불교학과를 선택하신 것은
진정 인류의 중생들을 위한 부처님의 가피가 아닐까요!!
고익진 박사님께서는 근본불교를 복구하시고 재정립 하신 후
최봉수 교수님으로 하여금 계승하게 하신 것은
부처님의 가피라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이제는 부처님 원음처럼 재정립된 근본불교가 온 세상에 두루번창하여
일체중생이 " 이 고 득 락 " 할수 있는 불국토가 건설되기를 간절히 발원합니다.
나무 서가모니불 나무 서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서가모니불.
2017.02.17 23:10
고익진박사님과 최교수님의 사제지정은 법으로 이어진 법상의 모습이시고
그 말씀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무 서가모니불 서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서가모니불
아침에 명절 차례, 저녁에 일가 친척들 모임 갖은 후 오는 늦은 밤
그다지 즐겁지만 않은 마음으로 오면서.....왜?
매년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달라지는 몸과 지루해진 마음을 또 느꼈기 때문이였는지,
아님 숙제를 못 하고 있어서인지.....
법우님 올려 주신 글을 경책 삼아서, 또 한 걸음 갑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