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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4 06:49
고귀한 침묵 속으로
팔정도八正道에서 정어正語는 꾸며대는 것이 아닌 말, 즉 거짓되거나 헛되지 않은 말을 이른다. 이와 반대 개념의 말이 기어綺語다. 불교의 10악十惡 가운데 하나로서 도리에 어긋나는, 진실이 없는 교묘히 꾸민 말을 뜻한다. 영어로는 talking nosense 또는 gossip 쯤에 해당하고, 이것을 경전에서는 잡담으로 규정해 놓았다.
초기 경전인 디가니까야 뽓따빠다의 경에 나타난 잡담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왕에 대한 이야기, 도적에 대한 이야기, 대신들에 대한 이야기, 군사에 대한 이야기, 공포에 대한 이야기, 전쟁에 대한 이야기, 음식에 대한 이야기, 음료에 대한 이야기, 의복에 대한 이야기, 침대에 대한 이야기, 꽃다발에 대한 이야기, 향료에 대한 이야기, 친척에 대한 이야기, 수레에 대한 이야기, 마을에 대한 이야기, 부락에 대한 이야기, 도시에 대한 이야기, 지방에 대한 이야기, 여자에 대한 이야기, 영웅에 대한 이야기, 도로에 대한 이야기, 목욕장에서의 이야기, 망령에 대한 이야기,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시시비비 거리에 대한 이야기" 등등이다.
부처님이 살아 계셨을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이런 잡담을 즐기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모였다 하면 의례 그런 것들을 입에 올리며 주절대고 있다. 여자는 2만5천 단어 정도, 남자는 1만5천 단어쯤을 늘어 놓을 때 스트레스를 해소시킬 수 있다고 한다. 잡담이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역할을 한다니 완벽하게 무용無用한 것만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에게 이런 잡담을 일체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출가 수행자들이 세속 사람들이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잡담을 나누는 것은 수행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셨던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더 정확히 말하면 잡담을 하지 말고 침묵해야 한다고 하셨다. 무턱대고 입을 다문다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은 아니다. 법담法談은 얼마든지 나누어도 되며, 침묵도 부처님께서 수행자들에게 요구하신 것은 단순히 입을 다물고 벙어리 흉내를 내라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ariya) 침묵이다. 무엇이 고귀한 침묵인가?
이에 대하여 목갈라나 존자가 다음과 같이 정의 해 놓았다. '수행승이 사유思惟와 숙고를 멈춘 뒤 내적인 평온과 정신의 통일과 무사유와 무숙고와 삼매三昧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에 들면 그것을 고귀한 침묵이라고 부른다.' 즉 고귀한 침묵이란 단순히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두 번째 선정에 든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한치의 유예도 없이 돌아가는 일상의 톱니바퀴 속에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을 매몰시키고 말았다. 본래의 자기를 사는 것이 아니라 의무의 틀에 긷힌 강요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잃어버린 채 떠밀려 살 것인가. 잃어버린 나를 찾아 수처작주隨處作住 입처개진入處皆眞의 깃발을 내걸 것인가. 그 방법을 고귀한 침묵에서 찾아야 한다.
한 소년이 공장안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회중시계를 잃어버렸다. 가보家寶를 분실한 소년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기계가 돌아가고 있는 공장안을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시계를 찾을 수가 없었다. 소년은 결단을 내려 아버지에게 시계의 분실 사실을 알렸다. 그 말을 듣고 사장인 아버지는 직원들과 함께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시계는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소년의 아버지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눈을 뜬 다음 입을 열었다. "모두 일손을 멈추고 조용히 하기 바라오." 사장의 주문에 따라 직원들이 일체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어서 사장이 전등의 스위치를 내렸다. 어둠을 앞세운 침묵이 공장안에 밀려왔다. 사람들은 숨소리도 크게 내지않고 앉아 있었다. 얼마쯤의 침묵이 흐른 뒤 그 침물을 깨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째칵째칵 그것은 시계의 초침 돌아가는 소리였다. 시계는 사람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 버려져 있다가 주위가 조용해지자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구조신호를 보내온 것이었다. 소리를 따라가서 시계를 찾아 든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했다. "얘야, 이 세상이 시끄러울 때는 조용히 있어 보아라. 잃어버렸던 소중한 것들을 찾을 수 있는 비결이 바로 그 침묵 속에 들어 있단다."
아버지는 잃어버린 시계를 찾는 과정을 통해 아들에게 아주 중요한 지혜를 일깨워 주었다고 여겨진다.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서도 분주함과 과감하게 이별하고 고요히 침잠하여 고귀한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60년이 걸려도 침묵하는 것을 배우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은 제대로 안 것이 아니다. 침묵의 위대함을 깨우치기를 바라는 뜻에서 죽비를 들었지만 이도 침묵한 것만 같지 못하다.
慧月스님
불기2559년 9월 13일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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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귀한 침묵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