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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1 02:09
***약사회 생활 속의 반야심경 2회 특강***
제1회
“관세음보살!” 다 관세음보살님처럼 보이니까 관세음보살님 하고 부르는 게 전혀 어색할 바가 없는데, 참 좋은 인사법이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그보다도 여러분 뵙고, 관세음보살! 하고 인사한 것은, 오늘 저에게 부여된 주제가 “생활 속의 반야심경” 하면서 큰 카테고리를 반야심경으로 잡아주셨어요.
알다시피 반야심경은 우리 관세음보살님하고 사리불존자의 대화가 주된 구성입니다. 경전 속에서는 관자재보살…. 이렇게 나옵니다마는 훨씬 우리 피부에 와 닿는 표현은 역시 관세음보살이죠. 그래서도 오늘 인사를 관세음보살 이렇게 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생각해서 그렇게 인사를 여쭈었습니다.
밤늦게 저는 또 이런 법회는,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처음인 것 같애요. (누군가가 큰소리로 아하하하!) 지금 자야 될 시간인데 이렇게 참 용맹정진하는 이런 법회가 있다는 걸 몸소 이렇게 느끼고 새삼스러운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만약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다면, 이런 늦은 밤에도 불구하고 하루 일을 다 마치고 부처님 모시기 위해서 이렇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러분들을 보고 “선재 선재라 기특하고 기특하다.”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해요.
부처님 말씀에도 선은 어려울 때 선이야말로 진정한 선이다. 이런 말이 있어요. 쉬울 때야 누가 좋은 짓 못합니까? 그런데 여건이 어렵고 힘이 들 때에도 선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선이야말로 진정한 선이다 라고 하듯이. 낮에 하는 법회 그게 어려울 게 뭐가 있고 또 낮에 하는 부처님 공부 그게 어려울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아~! 깊은 저녁시간에 이렇게 모여 부처님 공부하겠다는 뜨거운 열의를 이렇게 대하노니 아 처음에 제가 올 때의 마음하고는 마음이 사뭇 달라지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아이구 밤늦게까지 뭐한다고. 밤에는 자야지. 진짜 그렇게 생각을 했었어요. 그랬었는데, 여러분들 이렇게 뵈니까 그게 아니구나. 정말 부처님 모시는데 진정성이 넘치는구나! 하는 느낌을 깊이 이렇게 전달받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려고 했던 주제가 변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더욱더 좀 설득력 있고 더욱더 좀 흡입력 있도록 그래서 하얀 천이 염료를 빨아들이듯이 또 스폰지가 잉크를 빨아들이듯이 쏙쏙 좀 빨아들일 수 있도록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을 부처님 전에 이렇게 발원하는 입장이다 라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오늘 인제 저는 여러분들하고 아까도 이야기했듯이 큰 주제가 이제 반야심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알다시피 반야심경은, 경전의 성립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수준이 상당히 높습니다. 수준이 높다고 하는 것은 최소한 아함경이라고 하는 경전에서 설해지는 초기불교적인 가르침을 마스터한 사람들만이 실은 반야심경을 공부할 자격이 생깁니다. 특히 반야심경은 알다시피 여러분들 거기에 심자가 붙어 있잖아요, 그죠? 심 자를 여러분들은 대개 마음 심(心)자로 새기지만 마음 심자는 인도말로 하자면 칫타(citta)고 반야심경 할 때 심자의 원어는 흐리다야(hṛdaya) 그래요. 글자도 달라요.
흐리다야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며는 영어로 하자면 하트 심장을 뜻하는 말입니다, 심장. 그러니 반야심경 할 때 심자는 마음 심자가 아니고 염통 심자예요, 원래. 염통 아시죠? 전공이 또 약사분들이시니까 염통 이런 거 좀 잘 아시죠. (하하하!!!) 그러니까 반야심경은 우리말로 하면 염통경이에요, 염통경. 그래 심장이라고 하는 게 우리 몸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느냐? 사실은 생멸의 어떤 근원적인 역할을 하잖아요. 그죠? 뇌가 죽은 게 죽은 거냐 심장이 죽은 게 죽은 거냐 하지마는 아직도 법률적으로는 심장이 죽어야 죽은 거죠. 바로 심장이 핵심이거든요. 말을 해버렸네요.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은 반야부 경전 안에서도 핵심적인 교리만을 따놓은 경전이라는 겁니다. 그래 벌써 핵심적 교리만 따 놓았다는 게 뭡니까? 다른 반야부 계통의 경전보다도 결론적인 위상에 있는 경전이 뭐다? 반야심경입니다.
반야부 경전이 굉장히 많습니다. 서론에 해당되는 것이 금강경이고 그리고 본론에 해당되는 것이 팔천송반야 이만오천송반야 십만송반야 해서 아~ 방대해요. 그리고 결론에 해당되는 게 뭐다? 반야심경입니다. 그러니까 반야부 경전의 시작에 해당되는 금강경만 하더라도 금강경을 제대로 공부할려며는 어떻다? 앞에 아함경을 마스터해야 되거든요. 그리고 아함경을 마스터하고 난 사람이 사실은 처음 대하는 반야부 경전은 금강경입니다. 금강경을 끝내고 나서 팔천송반야 끝내고 이만오천송반야 끝내고 그리고 십만송반야를 끝내야지 공부를 하는 반야부 경전이 뭐다? 반야심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준이 굉장한 거예요. 반야심경을 끝내고 나면 법화경으로 바로 올라가버립니다.
참 고강한 수준의 경전을 우리 생활 속에 한번 적응한다든지 반영하는 취지에서 한번 이야기가 됐으면 좋겠다하는 이야기를 제가 메일로 듣자 약사회의 수준이 정말 대단하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일동 으하하하!) 아니면 우리 대행법우님의 수준이 대단한 건지…. 대행법우님이 고생을 좀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나를 오늘 여기 잡아오려고도 고생을 많이 했고 또 자리를 여기 잡는다고도 고생을 또 많이 했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진짜 놀라운 것은 제목입니다 제목. 그래서 좀 아찔했어요. 수준 높은 반야심경을 우리 재가자의 범부들의 일상생활 속에 어떻게 접목을 시킬 것이냐가 문제인 것이죠.
그래 여기도 우리 보현사 올라오면서 보니까 숫타니파타의 경지도 적혀 있고 그랬었어요. 그건 인제 아함경입니다. 그래 우리 범부들이나 우리 재가자들한테는 아함경 이야기는 오히려 와 닿는 게 많아요. 그런데 반야부 계통의 경전 중에서도 반야심경은 사실은 참 감당하기가 버거운 수준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께 큰 어떤 약속은 못 해드리고 또 저 스스로도 목적을 크게 잡지는 못합니다. 반야심경을 우리 생활 속에 완전히 접목시킨다는 것은 사실 제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욕심까지는 못 부리고 그래도 반야심경이라는 큰 카테고리에서 이야기해야 되니까 반야심경과 관련된 한 가지 주제만 제가 여러분들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쪼끔이라도 반야부 경전에 대한 이해가 좀 돈독해질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해야 되지 않을까 요렇게 부드럽게 갈 생각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원래 저에게 준 주제에 충분히 응하지 못한다 라고 하는 사실은 좀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일동 하하하!!!) 그게 만만치 않을 거예요. 우선 인제 우리가 반야심경 그러면서 이제 경전 이름을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좀 벗어도 되겠습니까? 예. 아직 여름 같애요, 그죠? 아~, 제가 이렇게 보여드릴 게 없어가지고 상당히 벗는 것은, 가급적이면 안 벗어요. 안 벗는데 안 벗으면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 하며는 열이 차 강의 컨디션을 100% 발휘할 수가 없어요. 그래 제가 쪼끔 쪽팔리더라도 전달은 제대로 하고 가야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참
좀 추한 몰골입니다마는 벗었으니깐 이해를 하시고 좀 살찌는 약 겉은 거 있으면 좀 대구 불자약사회에서 준비를 해가지고 주시면 감사히 받도록 하겠어요. 그런데 아마 안 될 거예요. 내가 별 약을 다 먹어봤거든요.
그래 우리는 인제 반야심경 하면서, 글자가 왜 안 나오지? 아! 이게 분필이 아니구나. 분필 갖다 주세요. (그 밑에 있습니다.) 어디 있어요? (흰 거 위에 얹혀 있습니다.) 요고? (예.) 이거? 오세요. 큰 거 가 와요. 나는 똥가리 같은 거 취급 안 하는데 똥가리를 내놨어요. 재료가 좋아야지요. 저거 올 때까지는 이거 한번 적어볼 게요. 우리가 인제 한자로는 이렇게 般若이라고 적고 반야라고 읽는다 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인제 다 아시는데 이건 알다시피 인도말을 소리옮김한 거거든요. 그래서 원래 인제 인도말은 로마글자로 적으면 요렇게(prajñā) 적는다고 하는 걸 조금 조예가 있으신 분들은, 약사회 불자님 정도 되시면 충분히 아시리라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냥 소리 옮김할 때는 이걸 프라즈냐 이렇게 읽어요. 한번 따라해 보세요. 프라즈냐 (일동 프라즈냐.) 그래 프라즈냐하고 반야하고는 발음이 조금 거리가 있는 듯하죠? 그죠. 그런데 전혀 거리가 없는 소리옮김입니다. 왜냐하면 인도말에 있어서 p 발음은 파가 아니고 빠도 아니고 바를 강하게 하는 겁니다. (힘주어) 바! 빠도 아니고 파도 아니고 바도 아니고, 빠하고 파하고 바의 중간 발음이에요. 그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발음이죠. 그래서 그냥 우리는 (힘주어) 바 하면 됩니다. 다음에 인제 여기 있는 r 발음은 우리말로 ㄹ 발음이 아니고 반모음이어서 목청을 많이 떨어주라는 신호입니다, 일종의. 그래서 아~~~하고 목청을 떨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프라가 아니고 (힘주어) 바~~~ 하고 목청을 떨면 됩니다. 그러니까 이거 어떻게 읽는다? (힘주어) 바~~~ 하면서 목청을 떨면서 바 발음을 내주면 저 문자 기호(pra)에 맞는 발음이 되는 거예요. 한번 따라해 보세요. (힘주어) 바~~~. (일동 힘주어 바~~~) 염소가 몇 마리 우는 것 같은데.
다음 인제 즌냐(jñā) 하는 말에서 j음은 묵음이에요. 소리를 안 냅니다. 그래 우리가 알다시피 영어 단어 know가 앞에 있는 k음이 묵음이잖아요, 그죠? 그래 소리가 안 나는 것처럼 즌냐할 때 j도 소리가 안나요. 그러니까 j가 빠져버리면 (힘주어) ‘바~~~ㅇ야.’ 그래 인도사람들도 이걸 뭐라고 발음한다? (힘주어)’바~~~ㅇ야’ 이렇게 발음합니다. 그러니까 반야와 (힘주어) ‘바~~~ㅇ야’, 상당히 소리가 정확하게 옮겨졌다는 게 느껴지시죠.
그래서 반야라고 하는 소리옮김과 관련된 이야기를 여러분들하고 나누었는데 실은 우리에게 중요한 거는 뭐냐 하며는 이게 어떤 뜻을 가졌는가에 대해서 사실 대개들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래서 뜻이 정확하게 뭔가를 알려면 결국에는 인도문자에 대한 어원적 분석이나 어휘적 용법에 대한 분석에 들어가야 돼요. 그래서 먼저 어원적인 분석을 해야 되는데, 우선 ‘즌냐’라고 하는 말의 뜻이 뭐냐? 영어로 하자면 ‘지식’을 뜻하는 말입니다, ‘지식’. 그런데 지식은 지식인데 그냥 지식이 아니고 (힘주어) 바~~~(pra~)라고 하는 접두사에 의하여 규정되어지는 지식이에요.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게 뭐냐 하면 이게(pra~) 무슨 말인가를 정확하게 아는 게 중요한데,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프라라는 접두사에 두 가지 뜻이 있어요. 하나는 before라는 뜻이 있습니다, before. 영어 단어가 자꾸 나오고하니까 조금 듣기 어렵습니까? 아이죠. 약사분들은 전문직종이기 때문에 대구 약사회불자회는 영어가 좀 된다고 내가 들었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뜻이 뭐냐 하면 before입니다 before. 알다시피 인제 before는 시간이나 공간의 이전 시간 이전 공간을 before 그러죠. 그러니 프라즌냐는 축자적으로 해석을 하며는 before knowledge. 그러면 before me하게 되면 뭡니까? 내 앞이 돼버리잖아요. 그죠. 그러면 before knowledge 하게 되면 뭐가 된다? 지식 이전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말 그대로.
그러면 지식 이전이 뭐냐? 여기에 주석이 뭐라고 붙느냐? ‘원초적인 지식’이라는 겁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지식이라고 한다면 지식의 뭐다? 보다 근저에 있고 원형에 있었던 것이 아무래도 앞에 있었던 거겠죠. 그래서 before knowledge는 어떻게 해석이 되느냐 하며는 ‘원초적인 지식’ 이렇게 해석이 됩니다. 그 원초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개념이 ‘완전한 지식’이라고 하는 파생적 해석을 낳게 됩니다.
완전한 지식을 영어에서 뭐라고 번역하느냐 하며는 wisdom 하고 번역해요. 그러면서 이걸 ‘지혜’라고 이제 번역을 하게 되는 거죠. 지혜. 그런데 서양사회에서는 knowledge만 해도 대단하고 인도 사회도 knowledge만 해도 대단합니다, 여러분들. knowledge는 뭐하고 사실은 짝을 이루는 말이냐 하며는 opinion이라는 말과 짝을 이루는 말입니다. 우리가 견해 그러죠. 견해는 뭡니까? 주관적인 겁니다. 그것과 짝을 이루는 지식은 객관적인 거예요. 그러니까 지 생각이 이렇다 라고 하는 거는 opinion이고 남들에게 근거를 가지고 설득시킬 수 있는 주장이 될 때는 지식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opinion 보다 지식이 훨씬 수준이 깊죠, 그죠. 지식보다도 더 수준이 깊은 게 뭐다? wisdom. 그래서 반야를 우리는 흔히 지혜다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서양 사회에서도 이건 단순한 knowledge가 아니고 뭐다? wisdom이다 라고 번역하는 데에도 이런 식의 반야에 대한 접근이 배경에 깔려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잘못된 생각이에요. 이게 지금. 반야의 의미가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쓰일 때에는 저렇게 쓰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한국의 학자들이나 한국의 불자들이 반야의 의미를 완전한 지식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적지 않아요. 서양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대개 그렇게 받아들여요. wisdom. 그런데 반야는 자체로 완성된 지식이 아닙니다. ‘반야바라밀다’가 완성된 지식이지, 반야 자체는 완성된 지식이 아니에요.
그러면 반야는 지식은 지식인데 어떤 지식이냐? 앞에 있는 ‘프라’라는 말의 뜻 중에 한 가지 뜻이 더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며는 forward라는 뜻이 있어요, forward. 이거는(before) 뭡니까? 이게 우리가 ‘앞에’ 하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면 이거는(forward) 뭡니까? ‘앞으로’라고 우리말로 해석이 되는 거예요. 그죠? forwarding하며는 뭡니까? 내 메일을 남에게 전달해주라 할 때 forwarding해주라 그러죠. 그죠. 앞으로 던져주라는 거예요. forward라고 하는 뜻이 프라의 뜻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프라의 뜻을 forward로 잡으면 반야의 의미는 어떻게 됩니까? forward knowledge가 되는 거예요. forward knowledge. 그러면 knowledge는 우리말로 뭐라 그랬죠? 지식 그랬죠. 그리고 forward는 우리말로 앞으로니까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반야는 ‘앞으로 지식’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앞에 지식’이냐 ‘앞으로 지식’이냐 두 가지 설 중에서 결국에 어떤 관점이 부처님의 반야의 의미로 낙착이 되느냐인데, ‘앞으로 지식’이 반야의 의미로 결정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들어보면 앞으로 지식이라는 말, 의미가 잘 들어옵니까 안 들어옵니까? 오히려 앞에 지식할 때는 원초적인 지식하고 의미가 드러났는데 앞으로 지식 하니까 좀 생경스러운 느낌이 들죠, 그죠? 그런데 ‘앞으로’라고 하는 말과 ‘앞에’라는 말에 차이점을 두는 것은 뭐냐 하며는 ‘앞에’라고 하는 즉 before라고 하는 접두사는 ‘존재’와 관련하여 쓰이는 말이고, 앞으로 forward라고 하는 접두사는 ‘동작’과 관련된 말과 함께 쓰이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앞에 있다. 됐죠. 말 됩니까 안 됩니까 존재와 관련된 말이 되죠. 그런데 앞으로 있다라는 말은 아예 없어요. 앞으로 가다 그러지, 우리말로도.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일동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라는 말은 동작과 관련된 말로 그쪽에서 쓰이고 우리말로도 쓰이는 거예요.
이 말은 ‘앞으로’와 ‘지식’이라는 말 사이에는 동작과 관련된 기본단어를 하나 개입시켜줘도 됩니다. 그러면 동작과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단어가 뭐냐 하면 to go ‘가다’입니다 가다. 지식이라는 것이 명사니까 가다라는 동사를 형용사적으로 처리해버리면 가는 이란 말이 돼요. 그러면 지식은 지식인데 지식은 어떤 지식이다? 앞으로 가는 지식 이런 말이 돼 버립니다. 다시 ‘앞으로 가는 지식’이라는 말을 조금 우리식으로 바꾸면 어떻게 바꿀 수가 있을까요? 나는 이런 단어를 한번 추천해주고 싶네요. ‘진행적인’. 같은 형용사고 우리말에 ‘진행한다.’라는 말 있죠. ‘진행한다.’라는 말은 갈 行자에 앞에 나아갈 進자, 그야말로 앞으로라는 의미를 안에 두고 있잖아요. 그죠? 그래서 앞으로 가는 걸 보고 뭐라 그럽니까? 진행. 뒤로 가는 걸보고는 퇴행 그런단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두 가지 반야에 대한 해석을 오늘 만나게 되는 겁니다. 하나는 before knowledge ‘원초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해석 하나하고 또 하나는 어떤 해석이 가능해진다? ‘진행적인 지식’ 두 가지 해석을 만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한번 물어볼 게요. 두 가지 해석 중에서 어느 게 더 마음에 들어요? 내가 이걸(before knowledge 원초적인 지식) 아니다 라고 미리 줄을 그은 것에 개념치 마시고, 당신은 그렇게 볼지 모르지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내가 볼 때는 어떻다? 이게 좀 나을 거 같다. 한번 여쭤봅시다. 원초적인 지식 하는 쪽의 해석이 나을 거 같다. 손 한 번 들어봐요. 진행적인 지식이 나을 거 같다. 손 한번 들어봐요. 역시 여러분들은 나한테 동조하는 의미에서 아주 선택을 또 그렇게 하셨습니다마는, 실제 서양 사람들은 진행적인 지식이라는 해석을 별로 선호하지 않고 원초적인 지식이란 이런 의미에서 완전한 지식이라는 의미를 뽑아내기를 좋아합니다.
자, 그러면 이것도(before knowledge 원초적인 지식) 문법적인 해석으로 맞아요. 이것도(forward knowledge 진행적인 지식) 문법적인 해석으로 맞아요. 맞으면 다음에 둘 중에 하나를 택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다른 자료를 봐야 되겠죠. 또 다른 자료를 볼 때 우리가 봐야 될 것들이 경전입니다. 경전에 반야라는 말이 실제 어떻게 쓰이느냐를 면밀히 검토를 해봐야 돼요. 그래서 실제 경전에서 반야라는 말이 쓰이는 걸 보게 되면 반야는 한결같이 ‘과정’이나 ‘수단’을 뜻하는 말로 쓰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나 목표로 쓰이는 말은 결코 아니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 우리가 오분향례(五分香禮)를 드립니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그러죠. (일동 예.) 그때 혜가 뭐다? 반야입니다. 그러면 계 정 혜로 끝납니까? 아니면 해탈 해탈지견으로 넘어갑니까? (일동 넘어갑니다.) 목적은 어딥니까? 해탈과 해탈지견이 목적이에요. 해탈과 해탈지견을 얻는데 우리가 꼭 배워야할 게 세 가지가 있으니 계와 정과 혜다. 아마 이런 구성이다 라는 건 알고 계시죠. 그러면 혜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습니까? 해탈이라는 목표를 얻기 위한 수단에 위치하고 있는 거예요. 수단에 위치하고 있는 그러한 반야를 완전한 지식이다 그러면서 거기에 완전성을 부여할 수가 있겠느냐 라는 거예요.
지식이라는 게 있고 해탈이 있으니까 지식이 완전해야지 어떻다? 해탈이 있다 그러면 말 되지 않냐 생각할 줄 모르시죠. 그러면 해탈지견(解脫智見)은 어떻게 설명할래요? 완전한 지식을 뜻하는 초기불교의 용어는 해탈지견입니다. 해탈까지 하고 난 다음에 알고 보는 바가 있으니 그걸 뭐라 그런다? 해탈지견. 위묵티 즌냐나 달샤나(vimukti-jñāṇa-darśana) 그래. 그러니까 완전한 지식은 해탈지견이지, 혜로는 과정적인 지식에 불과한 거예요, 위치가.
지금까지는 초기불교에서 내가 예로 들었어요. 대승불교로 한번 넘어가볼까요? 보현사도 보현보살이 숭상되는 도량입니다, 그죠. 보현보살은 화엄보살이에요. 화엄경에 보현행원을 행으로 삼고 문수의 지혜를 지혜로 삼는 구성을 갖고 있으니까. 그죠. 그럼 화엄경을 관통하는 수행법은 한마디로 말해서 10바라밀수행이라는 거 여러분들 아실 겁니다. 여러분들이 공부 오늘 주제로 주셨던 반야심경은 6바라밀이죠. (일부 예.) 이 정도도 아직 접수가 안 돼 있는 수준의 분들이라는 자꾸 의심이 들려고 그래요. (일동 하하하!!!)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바라밀은 여섯 가지가 있어서 6바라밀입니다. 그런데 화엄경에서 몇 가지 바라밀이다? 거기에 네 가지가 더 더해져 열 가지 바라밀이라는 거예요. 그렇게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묻는 거예요. 10바라밀 중에 여섯 번째가 뭐냐 하면, 6바라밀 순서를 그대로 따라가니까 6바라밀 중에 여섯 번째가 반야바라밀이죠. 그러면 반야바라밀을 우리가 지식 또는 지혜로 삼아가지고 지혜바라밀. 이렇게 우리가 번역을 했다 치자 이거예요. 10바라밀 중에 여섯 번째를. 그런데 열 번째 바라밀 이름이 뭔 줄 압니까? 지(智)바라밀이야. 그렇죠. 지바라밀이라고. 그러니까 여섯 번째는 프라즈냐 파라미타(prajñā- pāramitā)고 열 번째는 즌냐나 파라미타(jñāṇa- pāramitā)야.
그러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여섯 번째 바라밀다가 완성 쪽이에요 아니면 열 번째 바라밀다가 완성 쪽이에요? (일동 열 번째.) 당연히 열 번째가 완성 쪽이에요. 거기가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왜? 법화경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지견과 방편바라밀을 구족한 거라 그랬거든. 그런데 지(智)가 나오는 게 화엄경에서는 지바라밀 하면서 여기에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완전한 지식을 이야기할 때는 즌냐나(jñāṇa), 해탈智견할 때 그 智하고 글자가 똑같은 글자예요. 그럴 때도 즌냐(jñā)는 들어가지만 앞에 접두사 들어간다 안 들어간다? 안 들어가요.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도 반야는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완전한 지식의 의미로 쓰인 적이 없어요. 그걸 우리가 생각해본다면 어떻다? 원초적인 지식에서 파생되는 완전한 지식의 의미로서의 반야에 대한 이해는 어때야 된다? 우리가 좀 지양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 반야는 반야 자체로는 완전한 지식이 아닙니다. 반야에 대하여 맹신하는 태도를 버려야 됩니다. 반야 자체는 절대 목적이 아닙니다. 반야는 뭐다? 방편입니다. 목표를 향하여 가기 위한 뗏목이 반야입니다. 반야심경의 이해는 반야가 단순히 뗏목이요 방편이라고 그 위상을 정확하게 포착해주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거거든요.
목표는 오히려 바라밀이 목푭니다. 목표에 도달했음을 뜻하는 말은 뭐다? 바라밀다(pāramitā)의 바라(pāra)라는 말이 피안(彼岸) 건너편 목표를 뜻하죠.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뭐다? 뗏목! 건너편의 강가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 그것 중에 하나, 그게 뭐다? 반야라는 거예요. 그래 우리가 줄여서 반야심경 반야심경 하니까 그냥 반야라는 말만 추앙받고 숭배 받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거는 반야부 경전에 접근하는데 있어서는 치명적인 오해를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어요.
그러면 남아있는 반야에 대한 해석은 뭡니까, 여러분들. 진행적인 지식이지. 진행적인 지혜. 그러면 진행적인 지식을 가지고 조금 모자라는 듯해도 어쨌든 어떻다? 물고 늘어져야 돼. 붙들고 늘어져야 돼. 그러면 진행적인 지식할 때 지식의 의미는 뭘까? 뭘 보고 진행적인 지식이라 그럴까요? 반야부는 기본적인 아이디어가 진행입니다, 여러분. 이건 큰 이견이 없어요. 아함경의 불교는 ‘벗어남’의 불교요 반야경의 불교는 ‘나아감’의 불교요 법화경의 불교는 ‘돌아옴’의 불교다 그럽니다. 초기불교의 아함경은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하라 그럽니다. 해탈은 우리말로 뭐다? 벗어나라 그래요. 그런데 반야경에 가면 뭡니까? 아제 아제 바라아제 여기서 ‘아제(gate)’하는 말이 ‘가라’는 소리거든요. 가니 가니 건너가니! ‘가라’고 그래요. ‘가라’고. 그런데 법화경에 가면 어떻다? 회향. 회향은 뭡니까? 가던 방향을 돌려서 어떻게 해라? 돌아오라는 거예요. 그러니 진행이라고 하는 말을 반야라고 하는 말의 해석 속에 집어넣은 것은 반야부 전체의 분위기에서 보면 어떻다? 딱 들어맞는 건 틀림이 없어요.
문제는 진행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말을 어떻게 여러분들 피부에 와 닿게 설명하느냐? 이게 어려운 거예요. 그래 ‘여러분들 수준에서 좀 와 닿게 이해가 되면 그게 아마 생활 속에서 구현된 반야심경이라는 주제에 조금 부응하지 않는가’ 나는 인제 그렇게 생각하면서 머~ 안에 내용까지 들어갈 필요 없이 제목만으로도 이건 이야기할 바가 있다 이렇게 본 거예요. 인제 시작을 해볼게요. 이제까지는 뭐였다? 서론. 이제부터 뭐다? 본론이 되는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들어오는 시간은 잘 안 지켜도 나가는 시간은 칼같이 지켜요. 11시면 칼같이 끝내고 집에 갑니다.
자, 진행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걸 이제 우리가 좀 피부에 와 닿게 이야기를 하려면 한마디로 말해서 제대로 진행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다. 이렇게 풀면 됩니다. 어떻게 풀면 된다? ‘제대로 진행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이 바로 진행적인 지식, 반야다. 반야부 경전에서는 ‘진행해야 된다’ ‘가야 된다’고 하는 주장으로 넘쳐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심지어는 반야부의 시작이 되는 금강경도 응무소주(應無所住) 응당 머무는 바가 있어야 된다 없어야 된다? 없어야 된다. 머물지 말라는 말은 뭡니까? 움직여라, 가라는 말이죠. 그런데 가는 게 뒤로 물러나라는 소릴까요 앞으로 나아가라는 소릴까요? 당연히 앞으로 나아가라는 소리니까 머물지 말라가 퇴행을 우리에게 권유하는 건 아닙니다. 진행하라는 거야. 반야부 경전은 온통 우리에게 진행이라는 한 가지 깃발로만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문제는 진행이 중요할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건 뭔 줄 압니까, 여러분들. 나는 항상 이야기해요. 불교공부 하라 이야기 안 합니다. 수행하라 이야기 안 합니다. 저는 위파사나 하라는 이야기 안 합니다. 참선하라 이야기 안 합니다. 뭐라 이야기하는 줄 압니까? 불교공부 제대로 해라는 이야기합니다. 참선 제대로 하라. 위파사나 제대로 하라. 염불 제대로 하라. 참 중요한 겁니다.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거는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합니다. 웬 줄 압니까? 제대로 못할 거 겉으면 안 하는 게 나아요. 제대로 못할 거 겉으면 뭐다? 안 하는 게 나아요.
다 마찬가집니다. 밥도요 밥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짜 중요한 거는 뭐다? 밥을 제대로 먹고 잘 먹는 게 중요해요. 여기는 다 약사분들이시니까 약도 어떻습니까? 약을 먹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약을 제대로 먹는 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너무 당연한데. 너무 당연하니까 사람들이 놓치는 게 바로 이런 겁니다. 진행해라. 좋아. 진행,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거는 뭐다? ‘제대로’ 진행해라. 저는 이것과 관련하여서 늘 부처님 비유 하나 듭니다. 한번은 우리 부처님께서 당신의 법을 뭐라고 이야기했냐 하면 내 법은 물뱀이다 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물뱀이라고 하는 말이 인도말로는 알라갓다 그러는데, 아주 독한 뱀의 이름이에요.
여러분들, 뱀에 대해서 좀 아세요? 뱀에 두 종류가 있대요. 하나는 독뱀이고 하나는 독이 없는 뱀. 독뱀에도 두 종류가 있대요. 출혈독을 구사하는 뱀이 있고 신경독을 구사하는 뱀이 있다고 그랬어요. 신경독은 신경을 마비시켜서 죽이기 때문에 어떻다? 죽는 생물에게 고통은 크게 없습니다. 그런데 출혈독은 피를 썩히고 핏줄을 부패시켜놓고 터뜨려 죽인대요. 굉장히 고통스럽대요. 출혈독을 가진 뱀 중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육상뱀이 있고 바다뱀이 있어요. 육상뱀은 지형지물을 이용하기 때문에 출혈독이 그렇게 세지 않대요. 그런데 바닷뱀은 오직 독으로 승부를 걸어야 되기 때문에 독이 굉장히 맹렬합니다. 뱀 중에서도 독뱀, 독뱀 중에서도 출혈독을 구사하는 뱀, 출혈독을 구사하는 뱀 중에서도 바닷뱀을 알라갓다 뱀이라 그래요.
아 부처님 법이 그 뱀이라는 거예요. 참 쌩뚱맞죠. 여러분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화하고 따뜻하고 자비로 넘치는 줄 알았지. 저렇게 맹렬한 독을 가진 뱀에 비유되는 게 감당이 되십니까? 그러나 알라갓두파마 숫타에서 부처님께서 이야기하십니다. 뱀의 독이 세면 약으로 쓰인다. 독이 약이 되고 약이 독이 되는 이치는 정말 여기서는 잘 통하죠. 그죠. 제대로 쓰이면 약이요 잘못 쓰면 뭡니까? 독이 될 텐데. 독이 맹렬할수록 어떤 때는 죽을병을 낫게 해 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부처님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어느 죽을병에는 뱀의 독만이 약으로 쓰인다. 병에 걸린 사람이 처방을 받되 알라갓다 뱀의 독을 구해 와야 된다 해서 한 사람이 저 뱀을 구하러 갔다 이거야. 바닷가에 가니까 귀한 알라갓다 뱀이 나와 있는 거예요. 아이구, 저 귀한 것! 해가지고 몸통이나 꼬리를 잡았다. 어떻게 됐겠느냐? 어떻게 됐겠어요, 여러분들. 그럼 뱀의 독을 통한 이익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자기가 물려 지 핏줄이 터져서 죽는 고통이 예상이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뱀 잡는 매뉴얼이 있죠. 뱀 잡이 막대로 목뒤를 누른다. 손을 가져가 밑에 턱을 움켜쥔다. 다음에 독니를 뽑아 사기그릇에다 독을 짠다. 다음에 자기에게 다가올 수 없는 거리로 던져 넣는다. 일련의 절차가 있어요 없어요? (일동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야기를 하십니다. 뱀을 잡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잘 잡는 게 중요하다. 잘못 잡으면 어떻다? 안 잡느니만 못하다. 내 법이 그와 같다는 거예요. 너희들이 내 법을 가지고 공부를 할 때는 어떻다? 공부를 하는 게 중요한 것보다는 뭐다? 제대로 공부하는 게 중요하니 제대로 공부를 못할 것 같으면 어떻게 해라? 안하는 게 낫다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불교공부 제대로 하고 계십니까? 어 먼저 물어볼 게 있지. 불교공부는 하고 계십니까? (일동 하하하!!!) 나 불교공부 합니다 라고 하는 분에게는 꼭 우리가 여쭤봐야 될 질문이 뭐다? 제대로 합니까? 염불 합니까? 두 번째 질문이 제대로 합니까? 참선하십니까? 제대로 하십니까? 위파사나 하십니까? 제대로 하십니까? 중요한 것은 제대로 안 하며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거예요.
반야는 딴 게 아닙니다. 진행하되 제대로 진행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을 반야라 그러는 거예요. 가야되는 줄 누가 몰라. 그런데 잘 가야 되는 거예요. 진행해야 되는 줄 누가 모릅니까? 제대로 진행해야 돼요. 그렇게 제대로 진행하고 잘 가는 법을 알고 있느냐는 거예요.
이제 다섯 가지 방법을 소개합니다. 제대로 가는 법 다섯 가지. 길을 가다가 길을 제대로 가야 할 때 제대로 가게 하는 방법에 몇 가지가 있다? (일동) 다섯 가지. 다섯 가지가 있다. 나 오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다섯 가지 방법을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려고 해요. 제대로 진행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섯 가지 제대로 된 진행의 방법에 대한 지식이 뭐다? 아 간단하게 반야라고 해도 훌륭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이제 한 번 들어보시고 내가 다섯 가지를 다 갖추고 지금 불교공부를 해나가는지 또 삶은 영위해 나가는지 부처님에 대한 신행은 또 그야말로 진행해 나가는지 반성해보면 오늘 저녁이 그렇게 무의미하다 하지는 않을 거예요.
자, 첫째 제대로 진행하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가만히 기다려라!” 가다가 장애를 만나면 가만히 기다려라 그럽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길을 갈 때에 제대로 가는 방법 이야기하잖아요. 나를 편안하게 가게 놔둘 것 같애요, 길이? 장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업을 하더라도 장애가 있어요 없어요? (일동 있습니다.) 있습니다. 가정생활에도 장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일동 있습니다.) 나는 지금 가정생활에 장애가 없다 손 한 번 들어봐요. (일동 하하하!!!) 그런데 문제는 장애를 만났을 때 진행하는 요령이 필요해요. 그때는 어떻다? ‘가만히 기다려라!’ 그래요. 부처님 경전 중에 가장 신뢰할만한 권위를 가진 대표 경전이 대반열반경이라는 경전이 있어요. 대반열반경에 보면 참 이해가 될 듯 말 듯 한 내용이 있어요.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기 약 일주일 전으로 시기가 산정이 되는데 마지막 공양을 잡수십니다. 춘다라고 하는 금세공업자의 집에 초청받으셔서 우리 부처님께서 생애 마지막 식사를 하셔요. 그러니까 만 80세에서 7일이 모자라는 시기입니다, 이게. 그런데 연로하실 대로 연로하셔가지고는 워낙 맥이 없고 힘이 없으시니까 춘다라고 하는 참 신심 깊은 신자가 뭔가 영양가 있는 걸 대접하고 싶어 돼지고기 요리를 준비합니다. 그게 소위 수카라마다와(sūkaramaddava)라고 하는, 여러 가지 설이 많은데 어쨌든, 부드러운 돼지고기요리예요. 그런데 냉장고가 없잖아요. 밤에 요리를 해 아침에 대접을 하는데, 부처님께서 잡수시고는 제자들에게 일체 먹지 말고 구멍에다 묻어라 그럽니다.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는 자는 “인천마범(人天魔梵)중에 여래밖에 없느니라.” 그러면서 묻어라 그러셔요. 우리가 볼 때는 변질된 거야. 그래서 잡수시고 식중독 일으킵니다. 그게 마지막 잡수신 거야. 그래 인제 위로 토하시고 밑으로 피를 배변하셔요. 그러면서 마지막 열반의 침상이 놓여 있는 쿠시나라로 이렇게 이동을 하시는 과정에, 너무 지치고 힘이 들고 갈증이 생겨 조금 그늘에 쉬자 그럽니다.
그래 목이 마르니까 아난아 물을 떠 오너라 그래요. 그러니까 아난이 뭐라고 답하느냐? 아난은 알죠? 여러분들, (일동 아하하하!) 부처님의 비서실장이 아난인데. 이제 아난 보고 물을 떠오라 하니까 아난이 부처님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카쿠다라는 강이 있는데 아주 맑은 물이 넘쳐흐르고 카카페야라 그럽니다. ‘카카’가 까마귀야. ‘페야’는 마실 수 있는 그러니까 까마귀가 마실 수 있을 정도면 물이 아주 그냥 찰랑찰랑 찼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앞에 얼마 안 가면 있는 개천은 500대의 수레가 지나가 지금 물이 엉망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좀 기다려 거기 가서 먹자 그래요. 그래 부처님께서 가서 떠와! 그럽니다. 아 부처님께서 떠오라는데 어떡합니까? 카쿠다 강은 멀고 흙탕물 있는 실개천으로 가요. 가서 보나마나 흙탕물이지. 못 떠 옵니다. 흙탕물이어서 못 떠왔습니다, 부처님. 그럽니다. 그래. 가만히 앉아계셔요, 부처님이. 30분쯤 지났나? 가서 물 떠 오너라 그럽니다. 아이구 흙탕물입니다. 안 됩니다. 그래도 떠 오라고 하십니다. 가보니까 뭡니까? 흙탕물입니다. 그래서 또 그냥 와요. 그래? 그리고 또 30분 지나요. 갔더니 어떡합니까, 여러분들. 하 물이 맑아져 있는 거예요. 그래 물을 갖다가 떠 와 부처님께 올리면서 부처님의 위신력이란 부처님의 위대한 감화의 능력이란 하면서 마구 부처님을 찬탄하는 대목이 달라붙어요.
그래 저는 옛날부터 대반열반경을 공부하면서 왜 대목에서 아난이 부처님을 찬탄했는지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주석서, 이게 정통의 주석서는 아니어서 제가 더 고증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 뭐라 이야기하고 있느냐 하며는 아난이 세 번째 갔을 때도 여전히 물이 흐렸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안 떠가고는 안 될 것 같았다는 거야. 부처님께서 세 번을 지시하셨는데. 그래서 어떻게 했다? 물가에서 가만히 기다렸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들. 가라앉죠. 부처님께서 질문합니다.
“아난아 맑은 물을 떠왔네.”
“예.”
“니가 맑은 물을 얻기 위해서 무슨 일을 특별히 한 게 있느냐?”
하고 물으셔요.
“아무일도 안 했습니다.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그래 니가 도를 터지 못하는 것은 가만히 기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굉장히 중요한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아난존자는 다문제일(多聞第一), 그죠? (일부 회원들 예. 일동 하하하!!!) 좀 수준 있는 말을 쓸라치면 내가 불안해져요. 부처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깨달음과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관련된 정보를 입수한 장본인이 누굽니까? (회원들 아난.) 머릿속에 아난만큼 많은 정보를 갖춘 사람은 있어요 없어요? (일동 없어요.) 그런데 도를 왜 못 트는 줄 압니까? 조바심 때문에 못 튼 거야. 도를 틀려고 자꾸 자기의 도의 그릇을 흔들어버린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 흙탕물을 흔들면 어떻게 됩니까, 빨리 맑히려고? 더 흙탕물이 되고 흐려지지. 어째야 됩니까, 여러분. 누구 앞에든 무조건 맑아질 때까지 뭐하는 수밖에 없다? (일동 기다리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여러분들 사시다가 장애를 만나시거들랑 길을 가다가 장애를 만나시거들랑 발버둥치지 마세요. 우왕좌왕하지 마세요. 가만히 호흡을 가다듬고 기다릴 줄 알아야 됩니다. 제대로 가는 방법 첫 번째입니다. 여러분들 일을 만나면 어떤 경향을 보여요? (힘주어 크게) 뭐야, 이게! 하고 소리부터 지릅니까? 아니면 가만히 기다립니까? 나는 가만히 기다린다. 손 들어봐요. 나는 소리부터 지른다. 손 들어봐요. 나는 일을 만난 적이 없다. 손 들어봐요. 내가 아마 다음 달에도 한 번 더 오기로 돼 있는 것 같은데 2개월 동안에는 손 안 든다. 손 한 번 들어봐요.
지금은 이제 그 스님(이) 돌아가셨어요. 비구니스님 이야기를 하나 해드릴까 하는데. 그래 이제 그때만 하더라도 전국 비구니회 회장스님이셨는데 내가 참 그 스님 이야기를 자주해요. 자주 하는데. 성철스님 아시죠? 성철스님 80년대 그때 돌아가시고 해인사에 사리 친견하러 우리 갔잖아요. 그래 저도 제 아는 지기들하고 주로 보살님들이 많고 거사 네 명 해 관광버스 한 대를 빌려 갔는데 가는 길도 막히고 열 지어 참배를 하니까 그래서 기다리다보니까 밤이 깊은 거예요. 차는 떠나고 잘 데가 없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해인사 근처에 비구니 선원이 있어요. 아! 거기에 회장 스님 계시니까 거기 가서 우리 신세지자 해서 거기로 간 거야. 그래 인제 가니까 그렇게 반가워하시면서 밤늦게까지 지금처럼 이렇게 이야기가 이제 은은하게 차 한 잔씩 하면서 앉아 진행이 된 거예요. 그래 참 우리가 그분을 다 도인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짓궂은 우리 거사 한 명이 “스님 왜 출가했어요?”하고 여쭈었어요. 출가 이야기가 나오면서 이어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나와가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건데. 일제 때 법조인 집안의 며느리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아들을 낳고 네 살 되었을 때 해인사 쪽에 있는 비구니 선원에 출가를 했다는 거야. 그래 인제 행자 시절에 이제 선원 마당을 이렇게 쓸고 있는 어느 날, 해인사 이렇게 쭈~ㄱ 올라가잖아요, 야트막한 담 너머로 이렇게 보니까 자기 시아버지가 자기 아들 손을 잡고 오더라는 거예요. 뭐겠습니까? 자기 잡으러 온 거지. 아이구! 저기 잡혔다가는 어떻다? 내 출가의 뜻이 이지러지겠다 싶어가지고 뒤에 있는 가야산 상두봉으로 도망을 간 거야. 그래가지고 위에 가 혹시 가시나 안 가시나 지켜봤지. 이렇게. 안 가시고 툇마루에 이렇게 앉아 며느리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잡아갈라고. 명문가에서 며느리가 출가했다는 게 그렇게 기분 좋은 소식은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그래 우리가 스님께 여쭤 봤어요. 스님, 시아버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자식을 오랜만에 봤는데 가서 덥석 안아보고 싶고 볼이라도 부비고 싶은 생각이 안 납디까? 하고 여쭤본 거예요. 하~! 스님 뭐라는 줄 압니까? 감이라는 놈이 가지에 달려있을 때는 이 가지 감, 저 가지 감 그러지마는 떨어지고 나면 감이 어느 가지 감인지 누가 아느냐는 거야! 그 새끼는 떨어진 감이야. 딱 그러는 거예요. 정내미 딱 떼 뿌는 거예요. 아아~ 독하더마는요. 스님(선운스님) 저기 계시는데. (일동 으하하하!!!)
그렇게 올라가서 기다리는데 안 가시는 거예요. 내려갈 수가 있습니까? 인제 밤을 거기서 지내게 된 거야. 거기서 이렇게 지내게 되는데 그날따라 그믐이 되어 달도 없을 뿐만 아니라 그날따라 안개가 심해 별빛조차도 없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의 산길이라는 거예요. 그러니 이제 이슬은 피해야 되겠다 해 나름대로 이렇게 더듬더듬 어떻습니까? 모색해 어디 쉴 곳을 찾아 이렇게 가는데 하 몇 발자국 진행하다보니까 기분이 이상하더라는 거예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게 영 이상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아무 짓도 안 하고 자리에 그냥 가만히 앉아 밤새 이렇게 쪼그려 기다린 거야. 가만히. 그래 아침이 되어 스~ㄹ 여명이 오고 안개가 이렇게 걷히고 봤더니 깎아지른 절벽 앞에 요렇게 쪼그리고 있더라는 거야, 자기가. 하~! 하고 무릎을 쳤대요. 가다가 장애를 만나면 ‘가만히 기다려라!’
그날 밤 그때 그 이야기를 내가 들은 거예요. 그게 평생 당신이 수행할 때 수행의 뭐다? 지침이 된다. 일을 하다 장애가 나타나거든 변명하고 불만 터뜨리고 그래 억울함을 당하여 억울함을 풀려고 하지 마라. 그죠. 마음 다스는 길 마지막에도 이야기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나와요. 그죠. 기다려라. 그게 자기가 공부해 나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지침이 되는 겁니다. 그래 사람들이 그러지를 못해 다 그르칩니다. 이 기다림의 미학. 그래 요새 인제 불교계에서 느림의 미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마는 느림의 미학의 결정은 기다림입니다. 서두르지 않고 기다릴 줄 알아야 되고 기다림에 능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버스 잘 기다립니까? 와 안 오노 하고 어떤 때는 안절부절한다고 옵디까. 제일 좋은 방법은 뭡니까?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올 버스는 오는 겁니다. 인생사도 다 그런 것과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가다가 장애를 만났거들랑 어떻게 해랴? 가만히 기다려라. 모든 거는 무상해서 영원하지 않으니 장애 또한 영원하지 않습니다. 어느 시점이 되면 어떻습니까? 길이 보이고 틈이 열립니다. 가만히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보여요. 아, 이카면 되겠네. 그걸 못 참고 우왕좌왕하고 엄벙덤벙하고 날뛰다가 어떡합니까, 여러분. 식욕도 떨어지고 모든 건 거기서 단축됩니다.
지금도 이런저런 문제 속에서 하루하루 말은 못하지마는 어떤 곡절을 갖고 계시는 불자들이 계신다면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을 한번 해보세요. 가만히 놔두고 기다려라.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상처가 도집니다. 그게 뭐다? 제대로 진행하는 첫 번째 방법 제1칙입니다. 장애를 만났거든 가만히 기다려라. 아시겠죠. 몇 개가 남았습니까? (일동 네 개.) 오늘 네 개 다 할 수 있을까요? (일동 하하하!!!) 하는 데까지 해봅시다. 못해도 우리는 가만히 기다려야 돼. (일동 하하하!!!) 오늘 안에 끝내! 하고 나를 압박하거나 겁박하거나 하지 마세요.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이야기해요. 서울은 가야 될 거 아닙니까? 그죠. 대행거사님께서 여기서 자고 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데 아이고 아침 일찍 일정이 있기 때문에 내일은 아침 기차 타면 늦어요. 늦으니까 가야 됩니다. 그러니 기다려요. 내가 이야기를 다 못해도 우리는 뭐 해야 된다? (일동 기다려야 된다.) 그것도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니고 뭐다? 가만히 기다려야 된다. 가만히.
그러면 이어서 두 번째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 걸음에 닿을 수 없으니 여러 걸음을 각오하라.” 한 술에 배 부르려고 하면 안 됩니다. 길 떠나는 사람은요 한 걸음에 목표점에 닿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여러 걸음을 각오하는 자세를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주변에 이렇게 보면요, 불교에 두 가지가 있는 거 겉애요. 하나는 짝퉁불교, 하나는 정품불교입니다. 정품불교가 있는가 하면 짝퉁불교도 있습니다. 불교 안 믿는 거보다는 그래도 짝퉁불교라도 불교하는 게 나을까요? 짝퉁불교하느니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 짝퉁불교하는 거 겉애요 정품불교하는 거 겉애요? 그러면 내가 아는 불교는 정품이지. 손 한 번 들어봐요. 말 들어보니 짝퉁 쪽 같다 손 들어봐요. 그러면 뭘로 짝퉁과 정품을 나눌까요. 그런데 불자에도 짝퉁불자가 있고 불자에도 정품불자가 있습니다. 정품불교를 하면 정품불자고 짝퉁불교를 하면 뭐다? 짝퉁불자 아니겠어요. 그러면 짝퉁과 정품을 어떻게 나누느냐? 대구만 해도 나는 대구 지하철을 예찬하는 사람이에요. 전국 지하철, 내가 광주 지하철은 못 타봤어요. 대전도 안 타봤네. 다 타 본 거는 아인데. 그래 인제 서울 대구 부산 지하철정도는 이렇게 타보는데, 대구 지하철만큼 신뢰감이 가고 칭찬 들을 지하철이 없다는 거 아세요? 시간 딱 딱 지키고 그리고 아주 쾌적해요. 지하도나 플랫폼이나 이게. 서울에는 진짜 그거는 문제가 많아. 그거는 뉴욕지하철 완전히 닮아가는 형국이고. 암만 잘하려고 해도 그렇고, 부산도 그렇고.
그런데 대구지하철에서 특히 좋은 거는 뭐냐 하면 대구지하철은 잡상인이 없어요. 그런데 서울은 진짜 많습니다. 그래 한번은 잡상인 물건을 파는데 어떤 물건을 파는 줄 압니까? 요렇게 생긴 물건을 파는 거예요. 구멍이 다섯 개가 있는 거. 이게 뭐냐 하면요 좁은 수납장을 넓게 쓰는 아이디어상품이래요. 그래 우리가 여기에 딱딱 하나씩 걸잖아요. 옷걸이를 이렇게. 선반 바에다 걸잖아요. 그러면 다섯 개 걸어야 될 걸 요고는 요고 하나만 걸고 옷걸이는 여기다 이래 걸면 된다는 거야. 알겠습니까? 밑에 하나 더 걸면 여섯 벌 걸 수 있다는 거예요. 하나 걸 자리에. 어제까지 1500원에 팔았는데 오늘 1000원에 판다하니까 멍청한 서울 사람들이 수도 없이 사는 거야, 그걸. 그래 내가 그걸 지켜보는데 안 돼 죽겠는 거야. 저거 사면 안 되는데. 왜? 내가 사봤거든요. (일동 아하하하!!!)
내가 저걸 사봤어요. 사서 집에 걸어봤다니까. 뭔 일이 벌어지는 줄 압니까? 이게 찌~~ㄹ 늘어져 다 떨어지는 거야, 다섯 개를 걸면. 종이 다섯 장을 걸어놓으면 버틸까. 조금만 무거운 거 걸어놓으면 이것이 분명히 걸 때는 걸려있었는데 저쪽에서 돌아보면 떨어져 있어 이게. 그런데 이게 문젠 거예요. 뒤집어 걸어도 똑같애. 그래 한번 속은 적도 있고 해서 사람들 사는데 얼마나 안 됐는지. 아이구, 답답하더라고요. 그런데 한번은 백화점을 갔더니만 똑같은 걸 팔아요. 5000원. 사봤지. 뭐가 다르냐? 여기가 다른 거야, 재질이. 아주 강화 플라스틱을 써가지고 딱 걸려있는 거예요. 아 백화점에서 파는 걸 보고 뭐라 그런다? 정품. 그리고 지하철에서 파는 요걸 뭐라 그런다? (일동 짝퉁.) 짝퉁 그러는 거예요.
불교도 똑같애요. 짝퉁 정품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걸 보고 짝퉁이라 그러고 어떤 걸 보고 정품이라 그러느냐? 여러 가지를 내세울 수 있습니다마는 그중에 하나 딱 집어서 말하면,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다.’고 하면 짝퉁이다. ‘이것 하나만 하면 된다.’라고 말하면 다 짝퉁불교입니다. 예를 들어서 염불만 하면 됩니다. 조심하십시오. 참선만 하면 됩니다. 조심하십시오. 경전만 읽으면 됩니다. 조심하십시오. 주력만 하면 됩니다. 조심하십시오. 이거 하나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들은 다 조심해야 돼요. 짝퉁일 확률이 굉장히 커요. 그거 하나만 하면 될 것 같으면 뭐 하러 그렇게 많은 수행법이 나와요. 한 걸음에 갈 수 있다 한 방에 끝낼 수 있다 참 조심해야 됩니다.
내가 허리가 하도 아파가지고 우리 꼬맹이 보고 ‘한 방에 낫는 파스를 한번 사와 봐라.’ 그래 약국에 갔다 오더니만 아빠 ‘한 방에 낫는 파스야!’ 하고 들고 왔어요. “한방파스!” (일동 으하하하!!!) 이런 한 방이든 저런 한 방이든 파스에는 한방파스가 있을 줄 모르지만 불교에 한 방 불교는 없습니다, 여러분들. 여러분들이 가더라도 제대로 가야 돼요. 제대로 갈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제대로 가는 법을 알아야 됩니다. 그게 반야입니다. 우리 인생살이 속에서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게 왜 없겠어요? 다 소구 소망이 있어요. 꼭 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러나 아무리 사소한 걸 이룬다 하더라도 한 방에 이룬다고 생각하면 다 조심해야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게 반야고 반야심경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 초기불교만 해도 8정도예요. 바른 길은 몇 개다? 여덟 개다. 6바라밀 그래요. 완성에 이르게 하는 방법에 반야만 있는 게 아니고 보시도 있고 지계도 있고 인욕도 있고 선정도 있고 정진도 있고 그죠. 이거 하나면 된다는 법은요 불교 속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만나본 많은 불자들은 “한 방 불교”라는 짝퉁불교의 피해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어요. 이것만 하면 된다는 제안에 너무 쉽게 빨려 들어갑디다. 여러분들께는 좀 실망스러운 이야기일 줄 모르지마는요 그거 잘못 가는 겁니다. 한 걸음에 닿을 수 있다. 딱 조심하십시오. 이거 하나면 된다. 딱 조심하십시오. 벽만 쳐다보고 도만 트면 끝이다. 그거 로또하고 똑 같은 겁니다, 여러분들. 로또에 당첨만 되면 인생 역전? 당첨되는 사람도 있죠. 그게 나일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나 아닐 수가 훠~~ㄹ씬 많아요. 그러니 거기다 맡길 수 있습니까? (일동 없습니다.) 그냥 훨씬 많은 게 아니고 뭐다? 훠~~~~ㄹ씬 많아요. 또 그거에 필이 꽂히시는 분들이 한 세 분 계시네. 이처럼 여러분들 많은 걸음을 여러분들은 각오해야 됩니다. 더 중요한 게 두 번째 방법의 행간에 들어있어요. 여러 걸음을 걷되 반드시 “순서”에 입각해서 걸어야 된다는 거야. 알겠습니까? 여러 걸음을 무턱대고 걸으면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차례 순서 절차에 입각하여 여러 걸음을 걸어라.
차례 순서 절차! 이것을 또 강조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한 걸음에 안 될 뿐만 아니라 여러 걸음도 그냥 여러 걸음이 아니고 뭐다? 여러 걸음 사이에 연결고리를 가지고 순서와 절차와 차례에 입각해서 걸어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항상 당신의 가르침을 뭐라고 말했다? 내 가르침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 어떤 사람은 문제제기로서의 서론도 좋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인 본론도 좋고 귀결인 결론도 좋은 걸 보고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고 했다 하지만, 좀 다른 관점도 있어요. 나는 처음 말할 것은 처음에 말하니 처음이 좋은 거요 중간에 말할 것은 중간에만 말하니 중간이 좋은 거요 끝에 말할 것은 끝에 말하니 끝이 좋은 거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앞과 중간과 끝이 순서를 갖추어서 말하니 내 법은 좋은 법이야. 이렇게 들어간 겁니다.
부처님은 흔히 약사여래로 잘 비유가 됩니다, 그죠. 그럼 치명적인 질병에 걸린 우리에게 부처님이 약처방을 주시거든요. 이 약은 아침에 먹고 이 약은 점심에 먹고 이 약은 저녁에 먹고 이 약은 자기 전에 먹어라. 그러면 어떻게 먹어야 됩니까? 순서에 맞춰서 먹어야 됩니다. 그런데 아침에는 점심 걸 먹고 점심에는 저녁 걸 먹고 저녁에는 빼먹고 그리고 자기 전에는 아침 걸 먹으면 그게 약입니까 독입니까? (회원) 독이죠. 그럼, 암만 좋은 약도 어떻다? 순서를 지키지 않으면 독으로 바뀌는 이치를 여러분들이 제일 중요시 여길 겁니다. 그래서 아침약 점심약 저녁약 꼭 적어주는 거 아닙니까? 부처님 도리라고 뭐 그렇게 다르겠어요?
그리고 약 하나만 가지고 됩니까? 안 되죠. 감기만 걸리더라도 어떻습니까? 요새는 항생제 안 씁니까? 항생제에 소염제에 해열제에 소화제에 비타민제까지 넣어줘야 되잖아요. 나도 좀 지어봤어요. (일동 하하하!!!) 옛날에는 자격증 없어도 옆에서 보고 막 지어 먹어요 그죠. 약국에 가면 약 달라면 주대요, 그죠. 지가 알아서 이렇게 해 감기 걸리면 막 먹고 그랬죠. 요새는 그렇지 않은데 20년 전에는 그런 세월 살았지 않습니까. 하나만 가지고 안 됩니다. 여러 걸음을 각오해야 되요. 여러 걸음도 어떻다? 반드시 차례와 순서와 절차를 지켜야 되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여러분들, 나도 불교공부를 하는데도 나는 왜 도를 못 트느냐를 설명해줍니다. 내가 하는 공부가 부처님 경전에 있는 부처님 말씀은 맞아. 나도 부처님 경전 보고 했어. 그런데 왜 나는 도를 못 트지? 순서가 틀리면 아무리 부처님 경전을 봐도 도를 못 틉니다. 순서와 차례와 절차를 준수한 여러 걸음을 각오하라. 이게 뭐다? 진행을 제대로 하게 하는 다섯 가지 방법 중에서 제1칙과 제2칙입니다. 몇 가지 남았습니까? (일동 세 가지.) 아시겠죠. 아는 사람은 알아요, 이쯤 되면. 오늘은 끝났다는 걸. (일동 하하하!) 아~! 세 가지 중요합니다. 그거는 언제 이야기한다? 다음 달 네 번째 주. 부처님 은혜로 별 일은 없을 겁니다. 여러분들 찾아뵙고 그때 마무리 세 가지 끝내면서 제대로 진행하는 방법에 대한 지식 또는 지혜인 반야의 의미 하나라도 우리가 요번에 확고히 하는 기회를 누리도록 했으면 좋겠다 하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런 자리까지 오도록 많은 분들이 애쓰셨다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또 도량을 이렇게 내어주신 보현사 측에도 고맙다는 말씀드리고 우리 신임 회장님이랑 또 대행 법우님이랑 각별히 감사하다는 말씀드리면서 그리고 오늘 인연이 되어 우리 선운스님께서 오셔서 증명법사를 해주셔서 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다 감사드리면서 오늘 제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일동 크게 열렬히 쨕쨕쨕!!!)
※이글은 최봉수 교수님께서 2013년도 하반기에 2차례에 걸쳐 대구불교약사회에서 특강한 내용입니다. 혹여 잘못된 부분은 녹취한 저가 잘못 듣고 잘못 기록한 것임을 밝히면서 아울러 여러분들의 너그러운 아량으로 양해바랍니다.
삼가 보승 합장
2014.03.24 10:03
2014.03.24 21:48
보승님 열공에 감탄하고 남음이 없습니다.
교수님 강의내용을 녹취하셔서 한자 한자 올리신다는게 쉬운일이 아닌데 대단하시다는 말 밖에요~
생동감이 느껴지는 교수님 강의이십니다.
보승님의 자상하신 덕이 아닌가 생각되네요!
잘 보았고 잘 배웠습니다.참 훌륭하십니다.
앞으로도 좋은 일만 있으시고~ 건강하시고~가내에도 두루 편안하시고~ 계속 수고 좀 해주세요~
마하반야바라밀_()_
2014.03.26 01:47
여러 법우님,
이건 제불보살님과 스승이신 최봉수 박사님의 공덕입니다.
강의를 하셨으니, 우리가 이렇게 법락을 누리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건 녹취하는 것뿐이라서요.
이글을 보시고 많이 퍼날라서 함께 법락을 누리시길... 보승합장
2014.04.03 06:07
포교사단,불교공부 경전방 법문자료로 게시하였습니다.약간의 오탈자만 수정하였습니다._()_
2014.09.17 23:58
이런 좋은 법문과 글을 대강 읽었다가 ,오늘에서야 찬찬히 정독
하였습니다. 스승님의 좋은 법문에 보승님의 정성어린 녹취
작업에 몸둘바를 모르게 감사말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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