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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유산

2013.04.26 00:10

백담거사장경진 조회 수:17794

 법우님/ 이젠 완연한 봄날이군요/ 모두 추운 겨울지내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ㅣ.

운영자님들도 힘내십시오/ 백담거사가 오랫만에 수필 습작한편 올립니다/

일독해주시면 영광입니다/백담거사 합장

 

아버지의 유산遺産                   백담 장 경진

 

  아들만 둘을 키우는 막내딸이 한 달 전에 기다리던 딸애를 낳았습니다. 3.1kg의 건강한 아기였지요. 산모도 건강한 순산이었답니다.  손녀가 태어난 걸 보자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의 생각이 났어요. 우리 부부는 손자 셋에 손녀 둘이나 있는 명실상부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손자를 한명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뜨셨답니다. 손자들이 태어날 때마다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였지요. 특히 아버지 생각이...

 아버지는 내가 열네 살 되던 해에, 52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답니다. 아버지 성함은 장 용범張 龍笵 . 인동 장가  옥산파 玉山派31세손世孫 입니다. 열 살이나 어린 어머니와, 맏이인 경자누나가 겨우 스무 살이었고, 거의 두 살 터울로 4남 4녀 8남매를 두고 말입니다. 그때 난 중학교 2년생이었고  막내 남동생은 겨우 다섯 살이었답니다. 아버지는 3대 독자로 부산에서 태어나셨어요. 아버지가 7살이었을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합니다. 세월이 좀 흘러 할머니가 아버지를 데리고 재가하셔서, 힘들게 어린 세월을 보낸 아버지는 장사에 눈을 뜨신 모양으로 장사수완이 좋았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결혼 초에는 형편이 어려워서 만주까지 가서 살기도 했답니다. 거기서 딸도 하나 낳았는데 어려서 잃고는, 상심이 커서 다시 부산으로 와서, 부산 국제시장에서 포목 장사를 하며 생활이 안정됐다고 합니다. 거의 15년 동안을 장사하면서 돈을 꽤 모으셨답니다. 그 동안에 국제시장에 유명했던 큰 불이 세 번이나 났는데도 재기하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화재 보험 같은 게 없을 때라, 재기하기 위해서는 오직 ‘저 사람은 신용 하나는 확실하다.’ 라고 듣는 게 장사 밑천이었다고 합니다. 세 번이나 다시 일어서는 아버지를 보고 오뚜기같다며 아버지를 모두 칭찬하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 온 나라가 힘들 때이고, 부산으로 수도가 이전했을 때이니 그 힘들었던 상황이 눈에 선하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3대째 독자였으니 자식 욕심이 많았던 건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그때 우린 부산 토성동 꽤 큰 집에 살았는데, 어머니랑 금슬이 좋고 6남매 애들도 귀여워하며 돈도 잘 버는 모범 가장이셨답니다. 내가 네 살 때인가 용두산 공원에 친구들이랑 놀러갔다가 미군 군용차를 따라가며, 초콜릿을 얻어먹다가 길을 잃어, 아버지께 혼났던 기억도 납니다. 그 때 포목전을 비워놓고 둘째 아들 찾아다니느라, 고생하셨던 이야기도 들었답니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면서 술도 많이 드신 모양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돈을   벌고 나서는 건강을 위해서였든지, 시골로 내려가서 전원생활이 하고 싶었던지, 내가 여섯 살 때, 처가가 있던 어머니의 고향 의령으로 이사하셨답니다. 큰 짐차 화물 트럭에 짐이랑 어린 우리를 싣고 의령으로 이사할 때가 기억납니다. 그때 형은 토성 초등학교 다니며 야구선수였는데, 이사 가기 싫다고 아버지한테 대어들다 혼나기도 했답니다. 지금도 형은 의령으로 이사 온 것에 대하여 불만이 많답니다. 시골에 제법 큰 집도 사고, 논, 밭도 꽤 사서 직접 농사도 지으며 이사 초기에는 행복한 생활을 하셨답니다. 그런데 시골 와서도 동생이 두 명이나 더 태어나고 애들이 학교 들어가며, 돈이 많이 들어가니, 걱정이 되셨나 봅니다. 그래서 장터에 한 코너를 사서, 포목전을 다시 열었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시골에서는 5일 만에 장날이 돌아왔으니, 5일에 한 번씩 장사를 한 셈이었지요. 그런데 그 장사가 부산에서 크게 하시던 아버지께는 별 도움이 되지 않으셨답니다. 식구 수는 늘어났는데 벌이는 따라가지 못하니 아버지는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술을 더 자주 드셨답니다. 우리 동네는 동네 이름이 <동동 소입부락>이라 읍내 중심인 <중동>까지는 꽤 먼 거리였답니다. 우리 동네에는 술파는 곳이 없어 <술도가>가 있는 중동까지 술을 사러 가야했답니다. 처음에는 고등학생이던 형이 술 당번이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뒤부터는 그 술 당번이 나한테로 옮겨 왔지 뭡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 형이 술 받아 오다가 주전자에 있는 탁주를 재미삼아 홀짝 홀짝 마시고는, 집에 와서 어머니한테 꾸중 듣고는 샘물을 타서 드렸으니, 아버지가 모를 리 없었지요. 그 바람에 이틀이 멀다하고, 두 되짜리 주전자를 양 손에 두 개나 들고 끙끙대며 왔던 생각치도 못했던 벼락을 내가 맞은 셈이었답니다. 지금도 그 당시가 뚜렷이 기억난답니다. 키는 작은데다가 몸도 왜소하여 양쪽 손에 두 되짜리 노란 주전자를 들고는 조금 걸어오다가 손을 놓고 쉬고, 또 얼마 오다가 쉬고...참 무거웠답니다. 약 1,5km 거리다 보니, 한참을 걸어 고생하고서야 겨우 도착했답니다.

 아버지는 술을 참 좋아하셨답니다. 그리고 담배도 많이 피우셨어요. <파랑새>라는 필터 없는 담배를 피우셨는데, 혹 외삼촌들이 고급 필터 담배를 사 오면 파랑새 담배로 바꿔오라고 해서 피우셨답니다. 아마 자식들 커가는 걸 보면서 돈을 아껴야겠다는 마음에서 그랬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머니나 누나들은 우리 남 형제 모두가 ‘아버지를 닮아서 술을 지고는 못가도 마시고는 천리라도 갈 거라며 술 좀 적게 마시라’고 신신 당부해도 우리는 마이동풍, 우이독경이라 미안할 때가 많답니다.

 한 번은 아버지가 술이 취하여 모든 식구들을 집 밖으로 쫒아냈는데, 나 혼자만 졸다가 방구석에 갇힌 일이 있었답니다. 밖에서는 아버지가 마당에 서서 노래도 부르고, 술도 마시며 있는데, 난 무서워서 나갈 수는 없고, 오줌은 마려오고... 밖에서는 어머니와 형제, 자매들이 걱정하며 기다릴 터인데...할 수없이 방문을 열고 나오다 아버지한테 들켜서,,,겨우 뛰고 뛰어 대문열고 뛰쳐나온 일도 있었답니다.

 그리고 밥 먹을 때마다 아버지와 형과 나 세 사람은 따로 밥상을 받았는데, 항상 김 몇 장하고 계란 후라이, 갈치 한 두 토막이 나온 밥상이었답니다. 그 당시로는 제법 호사스런 밥상인 셈이었지요. 아버지는 항상 밥을 먼저 드시고 나가는데, 그러면 형과 나의 <남은 반찬 쟁탈전>이 벌어지곤 했답니다. 아마 아버지는 우리 형제가 먹으라고 남기신 것 같았습니다. 참 요즘 사정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거의 모두가 궁핍한 생활이었답니다.

 또 한때는 아버지가 어머니랑 형 누나들과 나를 모아놓고 말씀하시길 “경자엄마. 아들들은 고등학교까지는 졸업시켜야 하고, 딸들은 중학교는 졸업시켜야 하네. 그리고 형제들이 많은 집안이라 아들 한 놈은 공부를 대학까지 시켜야 되네. 의사나 판. 검사가 한 명 있어야 집안이 든든한 법이야. 큰 놈 경도는 공부에 재미를 못 느끼니, 작은 놈 경진이는 지가 하고 싶다면 공부를 꼭 시켜야 한다네.” 그런 말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잠 잘 때에도 사랑방에서 아버지와 형과 나 세 명이 자는데, 매일 밤 아버지가 무서워서 발밑 곁에 자는 난 아버지 몸에 닿을까봐 쪼그려서 자다가 키도 작아진 것 같기도 하답니다.ㅋㅋㅋ

 

  그리고 아버지는 인정이 많으셨어요. 농사가 꽤 많아서 일 년 내내 고정 일꾼을 한 분씩 모셨는데, 그 식구들을 우리 집으로 이사 오게 하여서 같이 살기도 했답니다.

 아버지는 조상모시는 제사에도 정성을 많이 들이셨어요. 우리 집 고조할아버지 제사부터 할아버지제사까지 제삿날만 되면 음식 준비를 많이 하게 했답니다. ‘오늘이 장 센네 제삿날이다’ 하며 앞 동네 우리 마을 열가구가 모두 열두시 넘게 까지 잠자지 않으며, 엄마랑 누나들이 날라주는 제사지내고 나머지 음식을 같이 나누어 먹기도 했답니다.  

 또 아버지는 <석돌이 아저씨>를 끔찍이 아끼셨지요. 석돌이 아저씨는 같은  동네 바드레에 있는 우리 논에 가는 길가, 오두막집에서 혼자 사는 외톨이 장년 아저씨였답니다. 어릴 때부터 지능지수가 낮고, 마음만 좋아 애들인 우리한테도  놀림을 당했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석돌이 아저씨를 간혹 집에 데리고 와서 음식도 주고, 양식이나 고구마 등이랑, 옷가지도 주고 막걸리도 같이 드시며, 격려해주기도 하셨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 형이랑 나는 아버지 관위에 흙을 덮다가 많이 울었답니다. 그 때 내가 너무 심하게 울어서 동네 분들이 모두 눈물 흘렸다고 합니다. 그때 아버지 관을 뛰어 넘으며 놀던 막내 경태는 일찍, 초등학교 때  상갓집 음식을 잘못 먹다 죽고 말았답니다. 그때 형과 나는 부산에서 공무원으로 초창기 시절을 지낼 때라 손쓸 도리가 없었답니다. 그 위의 동생 경발이는 아들 둘 낳고 벌써56살 노인이 다 되었어요.

 그리고 시골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난 어머니를 도우며 농사도 짓고 공부도 꽤 열심히 잘 했답니다. 그리고 매일 동네 어르신을 만날 때마다 고개 숙여  인사를 해 대니, 동네 분들은 ‘저놈은 인사도 잘 한다.’며 오히려 인사받기가 힘들다며, 저를 피해가는 등 핀잔 겸 칭찬도 많이 들었던 기억도 난답니다.

 

 옛날 형님이 장가가던 날 ‘아버지가 계셨으면 ...’하고 눈물을 흘렸는데,

나도 장가가던 날 어머니와 형 앞에서 그렇게 눈물을 흘렸답니다. 내 남 동생도 그랬고,,,그런 아버지가 지금도 계신다면...그 좋아하시던 약주는 얼마든지 드릴 수 있는데...의사나 판. 검사가 되진 못하였지만, 아버지 편하게 모실 수 있는데...형제 자매들과도 더 잘 지낼 수 있는 데...그리고 증손자, 증손녀들 얼마든지 자랑하게 만들 수 있는데...

 아버지는 아들, 딸 한명도 시집 장가가는 것 못보고 가시고 말았으니...어찌   원통치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뿌리신 씨앗이 내 식구만 해도 열 두 명인데. 우리 8남매가 다 합하면 50명 이상의 대가족이 되었답니다. 십 이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증손자는 비록 보지 못하였지만 아들 딸 모두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손자들 보는 앞에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명하신 대로 아들 딸 모두 힘든 공부도 다 졸업시켰답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씀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말씀에서, 보여주신 행동에서...그 귀한 유산을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의 자식사랑이 가슴에 사무쳐 온답니다.

 남에게 신뢰를 주는 그런 신용을 어떻게 쌓았을까? 신용중시의 장사 수완. 그게 장사에만 해당되지는 않으리라 느껴집니다. 그런데 우리 남매들 중 그 좋은 유산을 물려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형님의 일상생활의 신용 쌓기가 아버지를 닮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렇게 당부하신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의. 저희들 딸, 아들들은 물론이고. 자손들도 아직은 모르지만, 부족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처럼 그렇게 배움에 목말라하고 자식들 교육에 앞선 열정이 있었다는 건 그 당시로는 대단한 것이었답니다. 모든 남매들을 모두 중, 고등학교보내기가 그 당시는 어려운 결단이셨지요. 아버지 자식들은 그처럼 학문에 정열을 쏟지는 못하고 산답니다.

 그리고 주변에 인정을 많이도 베푸셨지요, 겉으로 표시나지도 않게 말입니다. 우리 남매들은 자기 앞가림하기에 바빠, 남에게 베풀지도 못하고 산답니  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다행인 것은 자식들 모두가 악한 놈, 욕심 많은 놈이란 소리는 듣지 않고 사는 것만이라도 아버지의 음덕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답니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이 좋은 유산 세 가지. 아버지의 반만 따라가더라도 성공한 인생, 행복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어떤 지식인, 선지식에 못지않는 아버지의 훌륭한 유산을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명심하여 실천해 나가야겠습니다.

 유일하게 우리 형제들이 쉽게 물려받은 유산중의 하나인 술은 줄이고, 끊으며 아버지의 세 가지 유산을 조금이라도 더 간직해나가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가 명하신 바를 따르지 못했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형님은 해병대에 입대하고, 어머니 혼자 논, 밭농사를 지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어린 마음에도,<아버지가 없는 빈자리의 어머니>를 두고 제가 부산에 있는 고등학교로 입학한다는 건 어머니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어머니는 내가 가고 싶은 학교로 응시하라고 몇 번이나 권했지만...내가 만약 부산으로 유학했다면 어머니는 제 뒷바라지 때문에 아버지와 약속한 동생들 공부시킬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을지도 몰랐답니다. 비록 좋은 도시 학교를 나오진 못하였지만, 난 하고 싶었던 공무원 생활도 했고요, 다니고 싶은 은행 직장도 경험했답니다. 모두가 아버지의 음덕이지 않습니까. 어머니의 음덕이고요. 막내 경태와 바로 내 밑에 경애가 떠난 지도 몇 년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이제 남은 6남매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애롭게 지내야 되는데, 그게 100점짜리가 못되니 ‘둘째 아들로써의 노릇을 못 하는구나 ’ 하는 생각에 마음 아프기도 하답니다. 형님의 건강도 좋아지지 않고, 아직 시집, 장가가지 못 한 딸이랑 조카들도 많고, 아버지의 빈자리가 너무 큰 것 같습니다. (201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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